추사가 남긴 전라도 금석(하)










 

추사가 남긴 전라도 금석(하)

추사와 선사(禪師)들의 인연

  추사는 불교와도 인연이 많은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충남 예산군 용궁리 자택 내에 화엄사라는 가족의 사찰이 있어,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을 섭렵하였기 때문이다.
추사는 당대의 고승들과 친교를 맺었고,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와의 관계는 돈독하여 다도와 불경에 대하여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때부터 중흥하게 된다. 초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즉 차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깨끗한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초의에게는 차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또한 시와 선도 둘이 아니었다. 

  초의와 추사는 동갑내기로 항상 편지글에는
웃음과 농이 넘쳐흘렀으며, 혹시 초의선사의 정성어린 햇차가 좀 늦게 당도하면 추사는 아부로, 때론 공갈과 협박으로 차를 원하였다. 아무튼 그리하여
차 한 봉지라도 얻으면 그 차향에 취하여 용솟음치는 우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붓끝을 움직여 글씨를 썼다. 초의에게 써준 "명선(茗禪)"이라는
불후의 명작이나 현재 대흥사에 걸려있는 "一爐香室(일로향실)" "運百福(운백복)"이란 현판글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차향을 머금게 한다. 또 제주도 귀향살이 때 써운 반야심경 한 벌은 그야말로 또박또박한 해서로 구도자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백파선사비에 대하여

   백파는 고창군 도솔산 선운사에
기거하였고, 그의 선사상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죽음과 삶이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특히 ‘선문수경’ 을 세상에 내놓자 이에 반박 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였다. 초의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라고 지칭되는바,
그는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깨달으면 교(敎)가 선(禪)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 초의의 절친한 벗이며 불교에 박식한 추사가 끼여 들어
백파의 오류를 적어 보냈고, 백파는 추사에게 13가지로  논증한 답신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추사는
또 「백파망증 15조」로 반박을 했고,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그 추사에 그 백파라고나 해야하겠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길에 백파를 만나기 위해
정읍의 조월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으나 그때 두 사람은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하였다. 그 후 다시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 있는사이 백파가
입적을 하여 다시는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입적한 후에 설두와 백암스님이 추사를 찾아와 백파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그는 백파와의
옛 일을 회상하면서 붓을 잡아 지금의 "백파선사비"가 탄생하게 되었다.  

추사는 비문 중에 "자기와 백파와의 논쟁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아무리 입이 닳게 말한다 해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스님을 일으켜 서로 마주앉아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즉 범부들은
백파와 추사가 나눈 선문답을 모르고 다만 그 들만이 그 진의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선운사 백파선사비(白坡禪師碑)는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번지 도솔산 선운사
부도전 내에 현존하고 있다. 이 비는 1986년 9월 9일 지방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전면에는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라고
썼는데, 이것은 추사가 백파를 화엄종주요 대율사라 칭송한 것이다.     

  추사의 작품 중에 많은 비갈(碑碣)이 있으나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선운사 백파선사비(일명 백파대율사비)로, 추사가 타계하기 1년전인 1855년(철종 6년)에 썼다.

백파선사비의 명문(陰記)를 보면 건립연도가 "숭정기원후사무오오월 일입(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 立)"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858년이다. 그렇다면 백파의 문도들은 비문을 받아서 바로 세우지
않았다. 즉 추사가 비문을 써서 설두와 백암 등에게 증(贈)하였다. 그러나 여건상 이 비를 바로 세우지 않고 약 3년 정도 간직해 두었다가 후(추사가
몰함)에 세우려고 하니 음기의 왼쪽 부분이 훼손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하여 추사체를 집자하여 비석 세운 날짜를 기록하였다고 임창순 선생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또 다른 부분에 의심이 있는데, 즉 본문의 마지막 줄 빈(貧)자부터 전(轉)자까지는 추사가 직접 쓰지 않고 집자한
흔적이 보인다. 왜냐하면 추사의 획은 가로획이 약 15도 이상 위를 향하고 있으나 마지막 줄의 압(壓), 풍(風), 불(不)자 등의 가로획은 너무
수평으로 가고 있어 힘을 잃고 있으며, 또 글자의 간격을 앞 글자들에 비하여 너무 비좁게 붙여 놓았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추사의 마지막 줄도
추사가 직접 써 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집자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고창 선운사에 가면 꼭 부도전에 들러 백파선사비를
한번 탐독해보기 바란다.  

 

임실에 있는 효자비

임실읍 정월리 당목 마을에 위치한 효자비각은 임실읍을 거쳐 강진쪽으로 칠팔백m 가면 왼쪽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자세히 보면 김복규 부자의 효심을 기리는 효충서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비석은 1855년 나라의 명으로 효행을 기록하기 위하여 전주시 삼천동에
세웠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김복규는 효성이 지극하여 16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중 천신의 현몽으로 신약을 얻어 달여드리니 그의 부모가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이 같은 행장을 찬양하여 나라에서 증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제수했다. 김기종은 부친의 효심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상에는
3년간을 묘소에 초막을 짓고 그 애통하는 곡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 울음처럼 산야를 메아리쳐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이름까지 호동(虎洞)으로
바뀌어 불려졌다. 

"김복규와 김기종의 효자비"는 현재 비각과 비석 전체를 임실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옆에는 효충서원이 있어 아산 송하영이가 쓴 편액과 주련이 있다. 이 효자비의 전면은 모두 예서체로 썼는데, 이미 추사체의
완성 단계로 중국의 어떤 예서의 필법도 들어있지 않고, 추사의 독자적인 자가풍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특히 추사만의 독특한 예서획을 구사하고
있으며 공(公)자의 두 점을 보면 마치 새가 창공을 비행하는 느낌을 갖게된다. 그리고 효자각 비액은 추사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비의 후면을 보면 추사의 활달한 해서체를
볼 수 있는데, 어느 한곳도 소홀함이 없고, 단지 무심의 상태에서 붓끝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추사가 남긴 전라도의 금석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운사의 백파선사비, 임실의 김복규와 김기종의 효자비 및 효자각 편액, 완주군 용진면의 정부인광산김씨묘비,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비가
있다. 각 행정기관들은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지정하여 보호해야 할 것이고, 이미 지정된 것은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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