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유영완 생애










유하 유영완 생애 (상)

유하 유영완의 본관은 문화이며 아호는 유하(柳下)이다. 1892년(고종 29) 현재 김제시 교동(지금의 성산 아래)에서 유은식(柳殷植)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유은식은 원래 가난한 선비의 자손으로 주경야독 글공부만 일삼아 가세가 빈곤하였기 때문에, 유하(柳下)에게는 가난을 덜고자 글과는 멀리하도록
엄격히 타일렀으나, 유하가 겨우 11살 될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고 지필묵을 좋아하여 서도삼매경에 빠지게 되었다. 즉 유하는
선친이 글공부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가업(家業)으로 내려오는 학업을 저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가업을 잇지 않고 농사를 선택한다면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되고 자식들 교육도 보란 듯이 할 수 있지만, 만약 예술의 길을 간다면 역경이 온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유하는
붓 한 자루에 모든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유하는 아버지와 석정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그야말로 예술을 상품으로 매도하지 않겠다는 지고한 선비정신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목욕(沐浴)재계(齋戒)하고 오랫동안 묵상한 다음 붓을 서서히 들어 한 점 한 획을 긋기 시작하였다. 

유하는 늘 말하기를 “내 비록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근근이 연명한다 하더라도 결코 가난을 부끄럽다거나 수치로 생각하지 않노라. 내 어찌 예술을
돈과 바꾸는 썩어 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겠으며, 혹시 이렇게 부자가 된들 그 예술이 살아 있는 순수예술이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는 청백함을
생활신조로 삼았고 그의 대쪽같은 성격이 바로 그의 서화(글씨와 묵죽도)에 반영되었다. 유하는 늘 성산 줄기의 대밭 숲 속에 자리잡은 초가삼간에서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을 하면서 붓을 가지고 놀았다.

유하는 어려서 석정 이정직에게 학문과 서예를
사사받게 되는 것이, 그가 대성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김제는 옛날부터 문인묵객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으로
석정(石亭)을 필두로 벽하 조주승, 심농 조기석, 유하 송기면, 설송 최규상 같은 걸출한 서예가들이 많이 나왔다. 유하는 이러한 묵향의 도시에서
선배들과 친교(親交)함으로써 서화의 길을 가는데 촉매작용이 되었다.

 

청년명필로 날리던 사연 

유하는 집안은 가난하지만 불철주야(不撤晝夜)로 글읽기와 글씨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 비싼 지필묵 값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붓에다 물을 발라
판자에 글자 연습을 하였고, 또 물이 마르면 다시 연습을 거듭하였다. 그래서 필경(畢竟)에는 그 마루판자를 갈아야 했으니 그의 집념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품을 팔아 생활을 해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러한 그를 보고 이웃이나 다정한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예술도 좋지만 먹지
않으면 예술도 못하는 것, 그러니 그 대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림과 글씨를 좀 팔아서 생활에 보태는 게 어떠냐”라고 충고를 했다. 이에
유하는 “생활은 생활이고 예술은 예술이오. 비록 굶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작품을 상업의 방법으로 내놓기 싫소”라고 하며 오히려 그런 충고를
하는 벗들에게 자기의 의견을 정중하게 말하였다. 유하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비록 먹고 사는 문제가 아주 중요했지만 우선 먼저 자신을 지켜온
예술정신이 첫째라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이것이 무너진다면 그야 말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집념과 의지 때문에 그의 나이
20세에 이르러서는 이미 청년명필로 김제 고을은 물론 전라도 전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의 국필로 그 당시 알려진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있다. 위창은 우리나라의 금석학에 대하여 상당한 조예가 있는 사람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서화인의 자료를 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 그리고 근묵(槿墨) 등을 편찬하여 일제강점기의
사라져 가는 우리의 서화를 보존하고 전승하였다. 이러한 위창이 우연한 기회에 전라도에 와서 청년 유하의 글씨를 보고는 장래에 대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재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글씨는 전라도 뿐 만이 아니라
경향간에 퍼져 당시 이름 있는 서예가들로 김제 땅을 찾아 유하의 글씨를 보고는 사사받거나 글씨를 조심스럽게 청하였다. 그러나 유하는 돈에 의하여 작품을 팔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그의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화랑가에서 다른 서화가들과 비교하여 많은 작품을 볼 수 없다.

 

유하와 예천명과의 인연

예천명은 당나라 구양순이 쓴 대표적인 비석으로서, 구양순체(구체 또는 솔갱체라함)라고 하는 것은 구성궁예천명이나 화도사비 등의 글씨를 가리킨다. 구양순(歐陽詢)은 당태종의
총애를 받아 홍문관 학사를 거쳐 태자솔갱령의 벼슬에 올라 사람들은 관직을 넣어 ‘구양(성씨)솔갱’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그는 왕희지를 기초로 하여
일가를 이루어 해서에서는 아주 독보적인 자리를 구축한 사람이다. 구양순의 해서는 필획과 결구의 법칙이 엄격하여 조금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특징으로 사람들은 그의 해서를 ‘구체(歐體)’라고 한다.

이 구체는 당나라 시대뿐 아니라 그 이후에
중국(송,원,명,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침은 물론이고 또 우리 나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서체에도 구체(歐體)가 풍미하게
되었다. 이 구체는 일본 등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고려시대 사찰과 과거시험을 보는 과장글씨는 구체가 아니고서는 많은 점수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글씨 중에 사찰에 있는 왕사나 국사의 비석은 대부분 구체의 서체가 가장 많다. 이러한 것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서당이나 성균관의
학생들은 가장 많이 구양순의 글씨를 공부하게 된다. 그래서 유하가 살던 시대에도 중국에서 가지고온 많은 필첩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은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한번 정도는 쓰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유하는 석정으로부터 서예에 관한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왕희지, 동기창, 미불, 안진경 등의 공부를 했지만 유독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에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예천명에 빠져 있는 유하의 글씨를
유재 송기면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글씨에 있어서 예천명이란
맹자의 호연장과도 같다. 이는 모두 기력이 넘치지 못하면 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금에 예천명을 배운 사람은 많으나 그 심오한 경지에 올라선
자가 적은 것은 모두 기력이 미치지 못한 데 잘못이 있다. 유하 유영완은 글씨를 쓰면서 예천명을 지독하게 좋아하여 수십년 동안 임서(臨書)를 하여
몇백 번에 이르렀다. 그의 뜻은 솔갱체(구체)의 골자를 뽑아내고자 다짐한 것으로 단순히 황태사와 같은데 그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뜻은 참으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다 할 것이다.”

즉 유하의 피나는 구체의 임서는 그만의
독특한 해서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비록 구양순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고 뒤지지 않을 정도의 정교함과 엄중함이 그의
글씨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유하를 사람들이 대부분 대나무에 뛰어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의 대나무를 치는 데는 바로 구양순의 해서체가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해서는 필획의 강건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선의 단아함과 선비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김진돈
전라금석문 연구회 회원>

 

사진설명

1. 강한 댓잎과 유연한 글씨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2. 난초는 꽃을 피우기 위하여 목마름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생 역정도
난초와 같아서 사람들은 난향을 좋아하는 것이다.

 

3. 어느 곳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스런 필치를 구사하는 유하의 행서 대련 작품이다.


 

4. 작은 글씨로 써진 유하의 행서는 왕희지에 바탕을 두면서도 독자적인 필치를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부분도)

 

5. 병풍에는 구양순체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유하가 평소에 갈고 닦은 솜씨를
마음껏 표현한 작품이다. (8폭 병풍의 일부)

 

6. 유하를 보통 묵죽도의 대가라고 하는데 사실은 구양순체를 유하의 자가풍으로
완성한 사람이다. 그는 구체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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