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호 (전 함라중학교 교장, 전주효자시니어클럽)  
/백형호 (전 함라중학교 교장, 전주효자시니어클럽)  

2022년 들녘의 결실도 마무리되어가는 늦은 가을 주말, 고창군 논밭과 마을 사이사이로 나 있는 ‘여백의 길’을 다녀왔다.

오십대 중반을 넘어선 제자들의 초청으로 고창 ‘여백의 길’ 걷기를 하고 돌아왔다.

밤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와 책상에 조용히 앉아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에 여전히 진한 여운 남아 있다.

사유의 여행을 지나온 느낌이다.

사유는 여백이라는 사색의 강을 거치고 나서 정제된다.

코로나19와 유난히 무더운 여름을 힘들게 지내며 쌓여 있는 답답한 마음에 어디론지 떠나고 싶은 유혹에 이끌려 서였을까? 여백의 길을 다녀온 덕인지 마음속 여백에 고마움과 따뜻한 행복감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여백의 길’은 고창 청보리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곳에서 여정이 시작된다.

고인돌이 지키고 있어 조상의 기운이 숨 쉬고 있는 고창의 무지개빛 들녘을 지나간다.

풍성한 결실을 내어주고 텅 비워가는 들판 길을 한가하게 걸어가다 보면 겨울맞이 김장을 위해 자라고 있는 탐스러운 무 배추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가다보면 핑크뮬이 좌우에 펼쳐진 보랏빛 길을 지나 나지막한 숲길에 들어선다.

숲길 사이에는 참나무, 소나무,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서해 바다의 시원함이 스며있다.

처음 ‘여백의 길’을 열었다는 안내자는 이 길은 ‘성공무대’라고 자랑한다.

고창군의 성송면, 공음면, 무장면과 대산면을 지나가는 길이기에 앞 글자를 따서 ‘성공무대’란다.

실제로 이 길을 걷다보면 사색과 명상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꿈을 다잡아 성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미소 짓는다.

길의 언덕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면 지나왔던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이 한눈에 보인다.

마을을 지나 동네마루에 뒷길로 들어서면 마을과 들녘 전체가 펼쳐진다.

마치 어린 시절 이웃들과 정겹게 지내던 동네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여백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어 들어선 시골집에 들어섰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제자들과 둘러 앉아 옛 추억을 얘기하며 올려본 밤하늘에는 별들이 투명하게 빛났다.

“저 별들은 30년 전에도 있었는데 아직도 있네요”하는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올 가을에도 지난 날처럼 밤하늘 북극성은 빛나고 수많은 별들이 여전히 반짝거리며 지난날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학창시절의 푸르던 꿈을 떠올리며 순수한 추억에 젖어보는 것은 때로는 ‘삶이 답답하고 힘들어도 이겨내며 잘 살아야 한다’는 일러주는 신선한 에너지원 아닐까.

‘여백의 길’ 주변의 여백에는 무지개 빛 매력이 스며있다.

황토빛 여백의 길, 붉은 색의 눈부신 길, 푸른 사색의 기회를 강요하는 초록의 길이 어우러져 있다.

고구마 밭, 콩 밭, 들깨 밭에는 황토가 펼쳐져 있고, 서해안의 붉은 석양에는 황토밭이 붉은 빛으로 한 여름의 뜨거운 정열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안길을 걸을 때는, 제 철을 잃은 수박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는 비닐하우스도 마주할 수도 있고, 예전리 마을 골목에는 구치뽕이 태양처럼 붉게 익어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을 사로잡기도 한다.

탐스런 꾸지뽕 열매 하나를 따서 ‘맛 좀 보라’며 건네주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는 할머니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여백의 길’은 논과 밭 사이를 지나는 길과 정겨운 숲길도 지나가며 질리도록 대화를 나누며 걸어도 지치지 않는 길이다.

원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어우러져 부담이 없는 시골 호젓한 길이다.

가족단위로도 걸으며 대화를 꽃피우기 안성맞춤인 길, 휴식이 간절한 여자 혼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다.

작은 숲을 지나는 길 옆 저수지에는 수연이 예쁘게 단장하고 온몸을 흔들며 맞아주고 몇 걸음을 더하면 손끝을 물들일 듯한 하늘이 둔덕과 입맞춤하는 공제선이 펼쳐진다.

‘여백의 길’은 마음 편한 치유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고향 산책길이다.

편한 마음으로 언제든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길이다.

올 가을 처음으로 찾게 된 ‘여백의 길’은 나의 비어있는 여백에 무언가 뭉클한 것을 채워주는 길이었다.

제자들과 헤어져 전주로 오는 길에 재학생이 줄어들어 안타깝게 폐교가 되어 낡은 잡초에 쌓여 초라하게 서있는 추억어린 학교건물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농촌 학교를 졸업한 후배 학생들이 졸업하고 세월이 지난 뒤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함께 즐거웠던 추억과 회포를 나눌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안타까움으로 아려왔다.

/백형호 (전 함라중학교 교장, 전주효자시니어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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