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립국악원 제30권 국가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김영자편 발간··· 생애 담아

전북도립국악원은 2011년부터 추진해온 연속사업인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사업 일환으로 올해 제30권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 김영자 편을 발간했다.

제30권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 김영자 편은 김정태 학예연구사가 김영자 보유자와 총 8회에 걸쳐 구술대담 조사를 실시해 구술을 채록하고 연구했다.

목차는 제1장 학습내력, 스승 이야기, 제2장 국립창극단 재직시절의 회고, 제3장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장 시절, 제4장 판소리 담론, 제5장 창극의 이런저런 이야기, 제6장 인생의 뒤안길에서로 구성됐으며, 부록으로 구술자의 걸어온 길의 연보가 실렸다.

대개 판소리꾼의 출신 지역은 소위 ‘시나위권’으로 알려진 경기도 한강 이남,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 서부지역을 태생지로 삼는다.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알려진 진채선(1847~?) 이후 시나위권 출신이 아닌 판소리 여류 명창으로는 경북 김천 출신의 허금파(1867~1949), 경북 선산 출신의 박록주(1905~1979) 명창이 눈부신 활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 대구 출신의 명창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소리꾼으로는 김영자(1951~ ) 명창을 거론할 수 있다.

김영자 선생은 유성준제 수궁가를 원형에 가깝게 전승한 정광수 선생의 수궁가를 제(制)대로 내려받아 199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준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승하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한편, 김영자 선생은 성우향(1934~2014) 선생께 ‘보성소리’라 불리는 김세종제 춘향가와 정응민제 심청가를 올곧게 학습 받아 1985년 제1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현재 전주를 중심으로 남편인 김일구 선생과 함께 온고을소리청을 열어 활발한 후학양성 등 전승 활동을 담당해오다 2020년에는 정응민제 심청가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김영자 선생은 타고난 소리목 바탕 위에 정권진, 김소희, 성우향, 정광수 등 쟁쟁한 대가들로부터 소리를 학습함으로써 성음이 실하고 야무지며 아니리나 발림으로 청관중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김영자 선생은 스스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밝힐 만큼 예능의 완벽주의를 추구하여 꼼꼼하고 소리에 대한 집념 또한 대단하고 프로정신이 투철한 예술인이다.

김영자 선생은 소리뿐만 아니라 연기에도 탁월한 예인이시다.

어릴 적부터 여성국극 공연을 보면서 또래 친구들과 역할을 흉내 내며 연기를 스스로 터득하며 잔뼈가 굵어졌다.

선생은 1975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발탁된 이후 창극 ‘심청전’의 심청 역, ‘춘향전’의 춘향 역, ‘별주부전’의 토끼 역을 맡아 갈채를 받으면서 주목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다양한 배역의 성격 창조를 통해 그 스펙트럼이 넓다.

김영자 선생은 2004년 7월부터 2011년 6월까지 7년 동안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장에 재임하면서 전라북도 판소리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대담과정에서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큰 측면에서 두 가지 사항을 제안하였다.

첫째는 창극을 한다면 단내에서 역할 오디션을 통해 그 역할의 수당을 줘야 예술단의 발전이 온다고 보았다.

두 번째는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도 수성 파트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김영자 선생은 2001년 남편인 김일구 선생과 함께 40여 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전주 풍남동 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을 열고 후진양성과 함께 판소리 대중화에 힘을 쏟아오고 있다.

요즘 판소리를 학습하는 제자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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