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본관은 울산이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공의 후손이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본관은 울산이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공의 후손이다.
하서는 인종(仁宗)때의 명신이며 이퇴계와 어깨를 나란히 한 성리학의 큰 학자로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한 거유(巨儒)였으며
향리인 장성에 필암서원(筆巖書院)이 있어 지금도 그를 모신다.
인촌이란 아호는 대구출신 서화가인 석재(石齊) 서병오(徐丙五)가 김성수의 태어난 마을 이름을 쫓아 붙여 준 것으로 그의 일생을 요약한 적절한 작호였다
할 것이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11일,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지산(芝山) 김경중(金暻中)과 장흥고씨(長興高氏)사이의 4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3형제는 태어난 후 요사하고 인촌이 큰 아들이 되었으나 백부 원파(圓波) 김기중(金祺中)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인촌의 모친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
개울에서 손바닥 크기의 새우를 잡아 치마폭에 싸안고 나왔는데 언덕에 올라와 치마를 펴보니까 그것은 새우가 아니라 길이 석자가 넘는 큰 잉어였다.

그것이 인촌을 얻는 태몽이었다.
인촌이 17살 나던 해에 줄포로 이사한 그의 집은 재산을 늘려 만석군의 부자가 되었다.
변산반도의 어민들에게 어로자금을 빌려주는 일을 시작했고 그 돈을 얻어 어구등을 장만해 바다로 나가면 반드시 만선이 되어서 돌아오는지라 자기 돈을
두고도 일부러 그 돈을 빌려 출어를 하니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낸 부자'라고 찬탄했다.
인촌은 창평 영학숙에서 평생지기였던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를 처음 만나고 송진우 백관수 등과 함께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하다가 군산 금호학교로
옮겼다.
인촌과 고하는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스스로 상투를 잘라 고향 집으로 보낸 후 일본으로 건너가니 그 때 나이 열여덟, 동경에 도착한 두사람은 신바시에서
인력거를 타게 되었다.
인촌은 젊잖게 발판을 밟고 올라가 좌석에 앉았는데 고하는 처음 보고 처음 타는 인력거라 발판에 앉고 말았다.
손님이 발판에 앉고 보니 무거워서 인력거를 끌 수가 없었다.
인력거꾼이 고하에게 좌석으로 올라가 앉으라고 권 했다.
일본 말을 못알아 듣는 고하는 그냥 버티고 발판에 앉아있었다.
답답해진 인력거꾼이 땅바닥에 글씨를 써 보였다.
"상이등(上二等), 하일등(下一等)"
발판은 일등석이니 요금이 더 비싸고 좌석은 이등석이니 요금이 싸니까 이등석으로 올라가라는 말이었다.
채림새로 보아 가난한 조선 청년들이니 요금을 비싸게 받는다 하면 재빨리 윗좌석에 올라가 앉으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자 고하는 인력거꾼을 한 번 노려보고는 우리 말로 근엄하게 나무랬다.
"그래! 안다. 그래서 내가 일등석에 탄 것이다. 우릴 깔보면 안돼. 우리를 조선 사람이라고
우섭게 보지마라.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왜 이등석을 탄단말이냐? 우리는 일등 손님이지 이등 손님이 아니야!"
한때 코메디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시골영감 처음타는 기차놀이'에 "이럭 저럭 서울에 도착을 해서 인력거를 타시는데 발판에 앉아 위로
올라 앉으라니 영감님 말씀 일등칸은 돈 더 받게 나는 싫소 예"라는 구절 그 반대였다.
두 사람은 와세다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지리과목에 '티벳'에 관하여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인촌은 군산 금호에서 배운 가락이 있어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인지 제법 소상하게 잘 써내고 나왔는데 고하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고하는 답안지에 단 석자만 써서 냈다.
'광차대(廣且大)' 넓고 또한 크다.
인촌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인촌은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경성방직을 창업하였으며 1920년 30의 나이로 민족지 동아일보를 창간한다.
인촌이 동아일보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B사감과 러브레터'등으로 유명한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은 당시 사회부기자였고 인촌보다 아홉 살이 아래였다.
그가 신참기자 때의 어느 날, 현진건은 술이 대취한 채 회사로 들어서다가 복도에서 김성수사장과 부딪쳤다.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되어 갈짓자 걸음으로 걸어오는 신참내기 기자를 보자 인촌은 기가 딱 막혔다.
"이게 누구여?"
그러자 빙허는 소리를 꽥 질렀다.
"네가 누군데 내 앞을 가로막는 거야? 어!"
"어허 이런"
"음, 뭘 쳐다 봐! 너 사장이구나?"
사장을 알아보기는 알아보는 모양 아닌가.
"많이 취했구먼"
"그래 좀 취했다. 네놈이 사장이라고 언제 나 술 한잔 사줘 봤냐? 있으면 있다고 말해봐 임마!"
그러더니 느닷없이 인촌의 뺨을 철썩 올려 붙였다.
동료 기자들이 몰려 나오고 모두들 이 해괴한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그러자 인촌은 서무부장을 불렀다.
"이 사람이 날더러 술 안 받아 준다고 행패를 부렸네. 나가서 인력거 불러다가 이 사람 집까지 태워다 주고 푹 자도록 해 주게"
 인촌은 그렇게 이른 후 사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동료들의 근심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술취한 개라지만 사장의 뺨을 쳤으니 모가지가 달아나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는 일 이요 출사는 받아 놓은 밥상이었다.
"죽을려면 무슨 짓을 못하나? 집에가서 푹 자라는 말은 푹 쉬라는 말이고 푹 쉬란말이사 그만두라는 뜻 아니겠는가."
"아까운 인재 하나 없어지는군"
그런데 다음날 술이 깨어 출근한 빙허는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술취하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뭐, 그게 무슨 큰 일이라고 야단들인가? 술꾼이면 그런 실수쯤은 있는 법일세"
"이거봐, 그러지 말고 사장실에 들어가 잘못했다고 빌게나. 내가 사장이라도 용서를 않겠지만 그래도 비는 도리밖에 없네"
부장이며 동료들이 설득했지만 내가 왜 비는냐며 현진건은 버텼다.
인촌이 이 소식을 듣고 사장실로 빙허를 불렀다.
"자네 그 기백 한번 쓸만 하네. 동아일보 사회부가 왜 그렇게 당당한가 했더니 바로 자네같은 기자가 있어서 그랬구먼, 그래 자네가 날더러
술 한잔 안 산다고 화를 냈지? 오늘 퇴근 할 때 나 좀 만나자고. 술이라면 나도 사양하지 않는 사람이야. 내가 한잔 살게 함께 가자고.응!"
껄걸 웃으며 말하는 인촌 앞에서 현진건은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빌었다.
그날 저녁 김성수사장의 술을 진탕 얻어 마신 현진건기자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1932년 마흔 두살의 인촌은 보성전문을 인수한다
미당 서정주의 부친은 인촌댁의 마름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혜화전문 재학 시절에 집에서 보내준 학비를 술로 마셔버리고 빈털털이가 된 미당이 계동 인촌댁을 찾았다.
"집에서 학비가 오지않아서 그럽니다"
"얼마나 되는디?"
"30원 올시다"
"아 그래? 잠깐만 기달리게"
인촌은 군말없이 돈을 내주었다.
징용을 피해 볼 요량으로 고창에 내려와 면서기를 하던 미당이 해방이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취직자리가 없었다.
미당은 인촌의 넷째 아들 김상흠(뒷날 국회의원)에게 동아일보 취직을 부탁했다.
인촌은 미당을 담박 문화부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계동집으로 찾아 온 그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말했다.
"자네 시가 아주 좋다며 나도 자랑스럽네."
1943년 12월5일 소석 이철승은 학병입영을 앞둔 보전의 장행회(壯行會)에 참석하고 있었다.
인촌이 연단에 섰다.
"나는 여러분의 교육을 맡았지 입영을 맡은 게 아닌데 오늘 이렇게 모였다."
인촌은 비통한 심정을 쏟아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서서 인촌의 부인 이아주여사가 만든 카레라이스를 막걸리와 함께 먹고 마셨다.
술기가 오르고 내일이면 군대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학생들은 모두들 흥분하기 시작했다.
교가를 부르다가 교문을 박차고 몰려 나갔다.
"일본 놈 경찰서를 쳐부수자!"
소리는 함성으로 울려퍼지고 대열은 성난 파도와 같았다.
인촌은 소석을 불렀다.
"이 사람들아! 일 저질르겠어, 자네들이 흥분해서 일을 저지르면 그나마 후배들은 배울 곳조차 잃게 돼! 오늘이 있듯이 내일도 있네. 설움
속에 설움을 씻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조선 민족이야! 단칼에 베려하지 말고 길게 보게".
이철승은 대열을 가로막고 인촌의 뜻을 전했고 겨우 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훗날 4,19혁명 전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던 날, 소석은 인촌의 말을 인용해서 해산을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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