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종숙은 정읍 고부 출신으로 한평생을 야당의 위원장으로만 살다간 불운한 정치인이다










은종숙은 정읍 고부 출신으로 한평생을 야당의 위원장으로만 살다간 불운한 정치인이다.

지방 토족의 유복한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명문 전고를 졸업하고 고대로 진학 했다.

원래 의과대학에 갈 생각이었는데 우연하지 않게 수술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법과대학으로 방향을 바꿨다.

20대의 고부 민선면장으로 명성을 쌓았고 도의원에도 당선되었다.

저 유명한 정읍 환표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은종숙이요, 구속까지 가는 곤경을 겪고
마침내 도둑 맞은 도의원 자리를 찾은 그의 일화는 모 방송국의 ‘정계야화’에도 생생하게 수록되어 있다.

지역의 정서와는 아랑곳없이 오직 진산계로만 일괄해온 은종숙은 정읍에서 줄곧 야당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왔으나 정작
국회의원으로 입후보 한 것은 두 번 뿐이며 그것도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10대 총선 때 정읍지역은 김제와 엮어 한 선거구였다.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으로 출마한 은종숙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정읍이 김제보다 유권자수가 9천명이나 많았는데도 김제출신인 김택하와 장경순이 당선,
정읍은 국회의원 두자리를 모두 빼앗기는 아쉬운 결과가 되었다.

10대 선거에는 이런 지역적 사정 때문에 정읍에서 야당인 신민당 공천을 받은
사람이 국회진출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때 공천경합에 나선 사람들중 은종숙을 비롯해서 전고 출신이 4명이나 되었다.


은종숙, 김원기. 김형래. 임광순 이 그들이었다.

어느날 이들 네사람은 서울 서린호텔 2층 커피숍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누구든 동문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공천을 받으면 이에 승복하고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서약서를 썼다.

그 내용을 보면  

전북 제 5지구당(정읍․김제) 신민당 공천을
희망하는 우리는 야전선의 단결을 바라는 유권자의 열망을 깊이 인식하고 신민당 공천을 신청함에 있어 우리 4인중에 당명을 받았을 경우 우리는 호양
협동정신을 견지하여 낙천자는 공천자에 적극 협력할 것이며 불연인 경우에는 다시 회동하여 진로를 모색할 것을 굳게 서약한다.

1978년 9월 1일

은종숙.김원기. 김형래. 임광순

 

동아일보는 가십난에 이들의 ‘서약’을 미담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공천은 김원기에게  돌아갔고 은종숙은 기회를 잃었으나 깨끗하게
약속을 지켰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고 고전적 특무상사로 기록되어 있지만 정치판에서는 드물게 진지한 일생을 산 사람이며 행보나
언행이 무거워 선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미소를 비롯해서 그가 상속한 적지 않는 가산을 정치판에 쓸어 넣고만 은종숙은 죽어서도 치료비를 정산하지 못해
시신을 못내 올 처지에까지 몰린 불운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검은색 정장차림이었던 그가 새로 양복을 맞출 여력이 없어서 헌 양복을 뒤집어서 새로 만들어 입고도 다녔는데
그 사실은 양복 웃 저고리의 왼쪽깃이 오른쪽을 덮어야 하는데 그의 저고리는 오른쪽이 왼쪽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몇몇 사람이 이를 알아 챘다고
한다.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려고 고향을 찾았다가 빈 손으로 돌아 오던 은종숙은 교통사고로 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고
전주 예수병원 응급실에 옮겨졌고 장기간 입원 끝에 뼈속에 철심을 박고서야 움직일수가 있었다.

그처럼 혹독한 고난과 가난 속에서도 지구당 사무실을 운영한 것은 불가사의한 집념이었다.

서울 청진동 ‘천지’ 가 은종숙의 단골 다방이었다.

언제나 책이 든 작은 손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에게 나는 곧잘 농담을 건넸다.


“ 형님, 국회에도 못 들어가는 양반이 무었을 하려고 공부는 그렇게 헌다요, 언제
시험을 봐서 국회의원 뽑는 답디까”

“ 이 사람아 떨어졌응께 더 공부하고, 당선되면 더 열심히 하고 그래야 쓰는 거여”


그러면서 사람좋게 웃었다.

진산 이후에는 김영삼 쪽에 항상 서있었고 문민정부가 들어서 일할 기회가 올 무렵 불운의 야인은 빛도 못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심장병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루르드에서 얻어 온 ‘기적수’ 를 들고
은종숙를 찾았다.

바로 이틀 후에 생사를 가르는 수술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부인이 나를 보고서 하소연을 했다.

“우리 모두가 성당을 다니는데 저 양반만 막무가네 랍니다. 수술들어 가기 전에
영세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그의 손을 잡고 권했다.

“형님, 고집 좀 그만 부리쇼. 형님 가족들이 모두 천주교를 믿는데 형님만 유독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없이 듣고 있던 그는 “평소에 나보고 ‘사람 좋으면 국회는 멀어가고 마음 좋으면
천당은 가까워진다’ 고 놀리더니 시방 무슨 사기를 치는거여 이 사람아” 하고는 그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이 돌아섰던지 은종숙은 세례를 맏고 ‘요셉’ 이란 본명을 얻었다.


 

신이 잠들었던가. 수술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뇌사상태로 있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평소에 그와는 형제처럼 지내던 손주항이 빈소로 달려와 통곡을 했다.

현역 의원시절, 세비에서 얼마를 떼어 이민우 부의장실에 자주오는 은종숙이 찾아
쓰도록 용돈을 맡겨 놓곤 하던 손주항이었다.

지기인 손한선. 한석원 들이 나섰고 김영삼대통령이 조의를, 김원기는 김대중의 조의를
전했다.

그러나 치료비가 누적되어 6백만원을 결산 하지 않고는 시신을 인도 받을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이때 국회 보사분과 위원장으로 있던 황명수의원이 문상을 왔다.

나는 황의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매달렸다.

“지금 당장 해결할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황의원님께서 병원장에게 전화를 한통화
해 주십시오. 황의원님이 책임 짓겠다 하시면 저들이 어쩌겠습니까.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병원장님 댁으로 전화를 걸어서 황의원과 연결시켜주었다.

“여보시오, 병원장님. 나 국회 황명수요 저 말이지.

우리 옛동지 은종숙이가 죽었는데 병원비가 밀려 내일 발인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게 될 일입니까 .

내가 책임질테니 장례를 치르도록 해주시오, 부탁합니다.”

저쪽에서 무어라고 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던 황의원이 수화기를 놓고 말했다.


“ 잘 알았다고 하누만. 내가 책임지는 거여”

정말 시원스럽게 해결을 봤고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사당동 성당에서 영결미사를 보고 그의 향리인 정읍 고부로 떠났다.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뜬 형님 은종관 묘 아래 시신을 안장할 때 함께 간 김종순이와 얼마나 울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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