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철 주필

포스트모던이즘의 세계적 광풍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초 권위 및 기존질서 타파라는 일종의 문화사조였던 포스트모던이즘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각 분야로 침투하면서 우리나라도 90년대 이후 2000년대 초까지 격변을 겪어야 했다. 정치는 과거 리더 및 엘리트 위주에서 벗어났고, 경제는 대중경제가 아닌 자기경영시대를 불렀고, 사회는 기존 권위와 질서가 무너졌고 종교는 이탈이 가속화됐다. 그런 것들이 너무 급속히 이뤄졌다.

젊은이들 주도의 그런 급변에 대해 기성세대는 조금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라며 지난 날 가치관의 기준으로만 못마땅하게 판단했다. 대하는 눈길은 싸늘함, 그 자체였고 젊은이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한 마디로 버릇이 없다는 식으로 매도했다. 간격만 벌여져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몇 년 전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소비주의가 대체했다.

모든 사조가 그렇 듯, 시대흐름이라는 게 기존의 흐름 속에 새 흐름이 번지 듯 사그라드는 포스트모던이즘의 바탕 위에 소비주의가 신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결국 유행확산이랄 수 있는 이 소비주의는 유명 연예인, 대기업 등이다. 연일 쏟아지는 TV광고 등을 통해 유행은 일상이 됐다. 걷잡을 수 없는 이 소비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메이커를 입고, 신발을 신는 게 아니라 메이커를 신는 유행의 화신으로 변하게 계속 조장하고 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것이 현재의 우리 사회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것은 시간 및 지면관계로 제쳐두고 우리지역 신문시장만 연관시켜 따져보자. 열개인가 열한개인가 된다는 신문숫자는 그렇다 치고, 도무지 시대를 읽어내지도 못하고 조직 자체도 몇십년 전부터 이어지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식으로 운영되며, 지면 역시 1면 하면 정책기사 위주로 도배질하는 습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판박이 신문들을 만드는지 신문숫자가 부끄러울 정도다. 일례로 시대따라 1면에 과감한 유행패턴이나 건전소비를 위한 기사를 올릴 수는 없는지 안타깝다. 또, 이건 상당히 중요한 얘긴데, 포스트모던이즘이 시들 수밖에 없었던 건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결국 인생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어서였고, 소비주의도 역시 삶의 해답을 구할 수 없을 게 분명한데 이에 대한 신문의 기능적 고민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 중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몇년 전인가, 중국의 인민일보가 조선일보 창간기념을 축하하는 메시지로 ‘시대와 함께 가라’는 뜻의 ‘여시병진(與時倂進)’의 글을 보낸 일이 있었다. 아무리 시장자본주의를 도입했다고 하더라도 다양성이 떨어지는 중국 사회주의 국가 신문의 메시지 치고는 너무 열린 생각을 담은 것 같아 꽤 충격적이었다. 그런 고민까지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지만, 최소한 왜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가 정도는 한번쯤 깊게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싶다. 그리하여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신문지면에 묻어나면 존재 이유라도 될 텐데, 참 아쉽다.

상황은 이런데 신문은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늘어난다는 얘기만 들린다. 다양화된 사회에서 신문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위에서 얘기했 듯, 시대를 반영한다든가, 어떤 역할에 대한 확실한 각오와 철학이 있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신문시장의 역기능만 증대될 뿐이다.

그와 함께 기존 신문도 이젠 존재이유를 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역할 찾기인데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구시대적 권위의 탈피와 함께 뭔가 공익 쪽으로 가야한다는 점이다. 구습대로의 현행방식으로는 궤멸만 있을 뿐이다. 그게 지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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