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철 주필

“아는 것만큼 보인다.” 일찍이 엘도프 헉슬리가 했던 말로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통칭일 것이다. 지식은 삶의 도구이고, 지혜는 그 사용방법을 의미하며, 많이 보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쌓으면 된다는 뜻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을 듯싶다.

사실 모든 현상은 그 대상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보는 사람의 시각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조그만 사물, 일테면 흔한 종이컵조차도 위나 아래쪽만을 바라보면 그저 원으로 보일 뿐이다. 항차 복잡다양한 사람이나 사회상을 어떤 한 마디로 꼬집어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실재했던 역사적인 사건들까지도 당시 사관의 입장과 훗날 그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이 달라 그에 대한 평가가 늘 엇갈려 늘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오죽했으며 ‘역사는 해석’이라고까지 규정했겠는가.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사를 너무 쉽게 단정짓는다. 더욱이 지식량의 폭증과 지혜 가치기준의 급변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잣대로만 모든 걸 재단하고 결론짓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독선, 그리고 오류를 범하는 일인지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건 지도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독단에 흐르고, 정도(正道)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독선으로 치우치고,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오류를 범하는 경향마저 보인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식체계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잘 나타내주는 비유가 있다. 사·승·마(蛇·繩·麻)가 그것이다. 약간 어두운 벽에 새끼줄을 걸어두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蛇=뱀)로 보고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의력이 조금 있는 사람은 승(繩=새끼줄)으로 본다. 그러나 통찰력이 매우 깊은 사람은 거기서 마(麻=새끼줄의 재료, 즉 본질)를 본다. 이것을 유식학(有識學)에서 사(蛇)로 본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승(繩)으로 본 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 마(麻)로 본 것을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을 듯싶고, 아무튼 이렇듯 인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인식체계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편견일 수 있는 자신의 판단으로 남을 쉽게 단정짓는 잘못을 그저 무심코 저지른다. 대인관계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함)라는 방편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살아가면서 공부하고 배운다는 건, 즉 지식과 지혜의 축적과정은 이 허술한 인식체계를 바로 잡아가는 것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를 소홀히 한다. 지식 축적은 학교공부로 이미 끝났다고 여긴다. 지혜는 생활과정에서 터득되어지지만 성찰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일회성의 단순 지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일쑤다.

설사 공부하고 배운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취미나 생업과 관계되는 것에만 치중, 정작 삶에서 필요한 지식과 지혜의 축적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우리사회가 전반적으로 개인이익추구사회로의 진입으로 인해 더욱 소홀히 취급될 수밖에 없는 세태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런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권하고 싶다. 성경에서도 지적했듯 남을 단죄하고 남의 말을 별식(別食)처럼 즐기는 것은 죄악이기에.

아무튼 편견에 의한 남 단죄 및 남 말하기를 좋아하고, 까닭도 없이 남 매도하기를 즐기는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 특히 그런 점이 우리 전북사회에 유난히 많은 것 같아 지역화합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고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정치계절이 다가와선지 특정인에 대한 매도 등이 난무하는 등 요즘 그런 경향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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