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자유당시절부터 군사독재의 어둡고 암울한 시대를 거치면서 야당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가슴아픈 이야기는 하늘의 별만큼 많다










일찍이 자유당시절부터 군사독재의 어둡고 암울한 시대를 거치면서 야당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가슴아픈 이야기는
하늘의 별만큼 많다.

그렇게 긴 세월을 그처럼 어렵게 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민주회복을 향한 그들의 의지와 집념이 오늘 날
이만큼의 민주시대를 이끌어 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을 때 민자당의 기구축소로 많은 기존 당료들이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하룻 밤 사이 직장을
잃은 당직자들은 무었인가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다.

특히 공채로 공화당에 발을 들여 놓은 후 민정당을 거쳐 민자당에 머물고 있던 사무처 당원들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무총장에게 몰려가 항의 겸 선처를 호소했다.

자신들은 시험을 거쳐서 실력으로 들어 온 공채출신이며 따라서 대안없는 면직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항변을 듣고 있던 최형우 사무총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맞다. 그렇게 실력있는 사람들이니까 시험봐서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지 않겠나. 우리 야당한 사람들은 밤낮없이 민주화 투쟁에 공부할 틈이 없었다. 시험봐서 갈 곳도 없는기라”

물론 약간은 각색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는 야당으로 오래 계속 살아 온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생각과
마음이 있다.

사실 독재와 맞선 저항의 세월, 그속에 몸부림쳐온 야당인의 한 많은 사연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알 수가 있으랴.

시련과 인고를 먹고 살면서도 해학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들의 뒤안에 아픔과 눈물로 점철된 가족들의 슬픈 생활이
있었던 것을 아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어둡고 괴롭던 시절 야당인들에게는 마땅히 모일 장소가 있을 수 없었고 몇몇 다방이나 동지들이 벌려놓은 가게정도가
유일한 아지트였다.

지금도 ‘흙사랑’이란 이름의 모임이 있지만 무교동의 ‘흙다방’은 5.16군사쿠테타 이후 야당인이 그들의 사무실처럼 모여들던 사랑방이었다.

김대중 오홍석 정진길 김상현 등등 훗날 청와대 주인이 되고 의정단상에 서게 되는 인사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
곳을 지켰다.

매일 마시는 찻 값과 속 태우듯 피워대는 담배 값도 수월치 않은 터라 점심 값은 누구랄 것없이 큰 부담이었다.

어떤 독지가가 백마를 타고 온 기사처럼 나타나서 “자, 나갑시다”하고 호기있게 몰고 나가기 전에는 점심은 저마다 해결해야 할 그날의 난제였다.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공연히 시계를 보며 긴한 약속이라도 있는 것 처럼 바쁘게 다방을 빠져나가지만 인근에
있는 중국집 ‘동숭루’에 가보면 거의 모두가 벽을 향하고 앉아 자장면을 먹고 있기 일쑤였다.

한영수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검정색 아니면 구로곤색 정장을 하고 다닌 그는 친구의 사무실에 들렀다가도 점심때가 되면 중대한 약속이
있다며 바쁘게 그 속을 나오곤 했다.

그러나 바쁘게 거리로 나선 후 그가 가는 곳은 파고다 공원이었다.

벤치에 일없이 앉아 있노라면 배는 고파오고 그래서 위로 물이 소는 공동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솟구치는 차가운
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집에 돌아 갈 차비가 없을 적에는 무작정 걷기도 하고 외국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선물로 건네 준 볼펜을 낱 담배
파는 좌판에 넘기고 버스표 한 장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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