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도 선천이라는 곳이야. 그러나 누군가가 내게 고향을 묻는다면 스스럼없이 ‘전주’라고 대답해. 내게 고향이라는 것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씨를 뿌릴 토양을 만드는 곳이거든. 태어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삶의 터전이 옮겨지는 거고. 그래서 내 고향은 평생을 살아오고 내가 죽어 영원히 묻힐 이곳이야.” 지난 1927년 평안북도 서천에서 태어난 이인철 체육발전연구원장(85)은 한국전쟁 당시 대구에서 본 경찰시험에 합격해 전주로 부임했다.

그 후로 60년을 전주에서 줄곧 지내왔으니 그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셈. 80이 훌쩍 지난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자랑하는 이 원장은 지난 1952년 서울에서 열린 제33회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여태껏 단 한차례의 체전도 빠지지 않고 현장을 누벼온 한국체육의 산 증인이자 전북체육의 역사 그 자체다.

그는 또 지난 1942년 일본인들이 전주의 역사와 향토사료를 담아 발간한 ‘전주부사(全州府史)’가 자신의 것을 포함해 단 두 권밖에 남지 않자 지난 2009년 전주문화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번역을 거친 후 편찬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한 향토사 연구도 꾸준히 진행해왔다.

“왜 그렇게 살아왔냐고? 전주는 타지 사람들이 봤을 때 소승적인 사고와 사대주의, 타지역 출신을 배격하는 순혈주의 등 발전할 수 없는 요인들이 집결된 곳이었어. 그런 내 고향 전주사람들에게 이 고장을 사랑하는 방법, 즉 애향의 정신을 새로 설정해주고 싶었지. 애향심이 있어야 이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별수 있나. 몸으로 보여주는 수 밖에.” 이 원장은 사고가 고정되고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이유로 젊은이들이 한데 뭉칠 수 있는 전주청년회의소(JC)를 창립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이 내린 애향의 정의를 전하기 시작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애향의 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지 말고 신뢰하는 방법을 익혀야 해. 우선 의심부터 하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니 뒤쳐질 수 밖에 없지. 그리고 어떤 일에서든지 앞장서봐야 해. 끌고 가다가 일이 잘못돼 따귀를 맞는 경우가 생겨도 뭔가를 주도해봐야 한다는 얘기지. 뒤만 따라다니니 어떻게 발전이 있을 수 있겠어? 마지막으로 황희정승의 논리를 부정해야지. ‘네 말이 옳구나, 그래 네 말도 옳구나’ 하는 그 논리. 황희 정승 같은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는 있으나 발전을 가져오는 사람은 못돼. 옳고 그름을 명확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을 따라 둥글둥글 살아가니 그 돌이 계속 굴러가기만 하는 거야.” 이 원장의 말에 따르면 각각의 개체는 무척 아름다운데 한데 뭉치는 접착력은 없는 모래알 같은 지역민들을 떨어져 있으면 볼품 없지만 뭉치면 돌보다도 더 단단해지는 진흙처럼 만들고 싶었단다.

이 원장은 JC를 통해 시작한 사회활동이 어느덧 50년. 자비를 털어가며 매년 찾고 있는 전국체전 참가는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는 그 세월의 흔적 동안 향토문화와 역사자료 등을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하고, 전북체육과 관련해서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사진과 문서자료들을 모아왔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난 대구세계육상대회에 초청돼 전시회를 가졌고, 그 동안 전북체육사(2002)와 전북축구 백년의 뿌리(2011), 사진으로 보는 한국체육 100년사(2011), 각 종목별 학술조사보고서 등 많은 체육관련 자료집도 냈다.

또 현재 전북체육회의 고문을 맡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들을 후배 체육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스포츠는 ‘스스로를 얼마나 이겨내고 참아냈느냐’ 하는 인고의 문제가 각자의 성패를 좌우하잖아. 한계에 부딪히고 노력하고 자기자신과 싸우며 흘린 땀의 양이 메달 색을 좌우하니 말이야. 그게 내가 평생을 체육과 관련해 즐겁게 보내온 이유고, 사회질서도 체육질서 같이 땀 흘리고 노력해 자기를 극복하는 자가 승리하면 좋겠어.” 이 원장은 현재 지역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사업을 묵묵히 2년째 진행해오고 있다.

“2년 전쯤인가 ‘전주부사’를 번역하려고 계속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거야. 왜냐. 책에 나온 사진 속 물건들이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거든. 일본으로 철수할 때 모조리 가져가버린 거야.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일제시대에 전주에서 살다 돌아간 일본인과 그 후손들이 모여 만든 ‘전주회(全州會)’라는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어렵사리 600명 정도의 연락처를 구해서 2년 전부터 편지를 보내고 있어. 얼마 전 프랑스에서 반환된 의궤도 5년 이상 노력한 결실인데 나도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이런 그가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내 뒤를 따라 부딪혀 보라! 부딪히지 않으면 발전도 없다!’라고. “전주에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 체육이 고스란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을 자랑하는 것이 사람들 기준으로는 객지사람인 나뿐이거든? 설령 다른 곳보다 뒤쳐졌다거나 늦었다 해도 아직 따라갈 수 있을 때는 따라가 봐야지. 방치한 채 시간이 흘러가면 더 뒤쳐지게 되고 어쩌면 영영 늦을지도 몰라.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역사와 전통도 퇴색돼버리겠지. 그래서 난 스스로 ‘전주 놈’이라는 주체성을 가지고 직접 부딪혀가며 이런저런 시험을 해보는 거지. 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는 이걸 보고 따라오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글=김근태기자·사진=이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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