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중요무형문화재 김동식 선자장

▲ "장담하지 못해도 크게 아픈곳 없이 괜찮은 오늘이 이어진다면 부채만들기를 멈추지 않겠다" 는 대한민국 최초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김동식 선자장./김현표기자

찌는 여름, 에어컨 바람보다 더 시원한 소식이 전북에 날아들었다.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김동식(72) 선자장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김동식 선자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통부채인 합죽선의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밝혔다.
전북에 20여명의 부채 장인이 활동하고 있지만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것은 김동식 선자장이 최초다.
동시에 문화재청은 ‘선자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로 신규 지정함에 따라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선자장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다.
이른바 가문의 영광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큰 기쁨일 터. 하지만 김동식 선자장은 7년 전 첫 대면을 했을 때 모습 그대로다.
각종 연장과 재료들이 쌓여있는 2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하얀 속옷만 입은 채 부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축하한다는 말에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만 돌아온다.
약간은 화려하고, 약간은 거창하고, 약간은 있어 보이는 국가문화재와는 영 딴판이다.
오히려 세상의 평이 어찌됐든 내 갈 길만 가는 묵묵함 그 자체다.
한평생 한 길 인생을 고집한 김동식 선자장을 만나보자.    
/편집자주

 

“전주의 많은 부채 명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으니 우리들을 모른 체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럴수록 몸을 더 낮추고 동료 종사자들과 탄탄한 네트워크 형성에 노력하겠다.”

 

김동식 선자장이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지난 2007년 전북도지정 문화재가 된 이후 8년 만이다.

명인을 찾아간 날, 쉴 새 없이 축하전화가 걸려온다.

고맙다는 답변은 하지만 무덤덤하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까지 얻은 심적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다.

명인이 문화재청의 문지방이 닳아질 정도로 드나든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다.

선자장을 중요무형문화재에 신규로 등록하기 위함이다.

다른 공예 못지않게 합죽선을 만드는 공정 또한 복잡하고 정교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목록에 없다는 의구심이 들면서부터다.

관련 서류를 들고 수도 없이 문화재청을 노크한 결과 심사에 합격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중요무형문화재에 선자장이 신규로 등록된 것이다.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과 함께 다른 선자장에게 무형문화재 접수를 권유키도 했다.

전남에서 2명 전북에서 3명 총 5명이 서류접수를 했는데 김동식 선자장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1차 서류심사에 탈락됐다.

2차 실기시험을 통해 심사위원을 만족시킨 명인은 전북 최초, 전국 최초로 선자장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게다가 선자장을 신규 등록시킨 장본인이 지정까지 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됐다.

만약 명인마저 탈락됐다면 선자장 자체도 등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주에서 부채의 맥을 이어온 지 60여년 만에 인간문화재 반열에 오른 것이다.
 

“처음엔 얼떨떨했다. 무엇이 되긴 됐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향후 활동에 신중한 생각이 든다.

정상에 오른다는 게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14세 때 부채 만들기를 배운 명인은 뼈 속까지 부채 집안출신이다.

외조부인 라학천 명장은 고종 황제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이어 라이선, 라태순, 무형문화재 라태용으로 이어지는 합죽선의 명성은 고스란히 김동식 선자장에게 전해졌다.

140여년, 4대째며 아들을 포함하면 무려 5대째 부채 만들기 집안이다.

처음엔 허드렛일을 하다 솜씨가 있다는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이 길에 뛰어들었다.

예전에 부채는 6방에서 분업을 했지만 일손이 귀하면서부터 홀로 전 과정을 다해야 했다.

재료를 구하는 일부터 살을 깎고, 잇고, 한지에 풀칠을 해 살에 붙이는 작업까지 모두 혼자 감당해야 했다.

명인은 전문적 분업이 이뤄지는 부채 제조과정을 홀로 완벽하게 재현하며 2007년 전북도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에 지정됐다.

수백 번의 섬세한 손놀림과 다듬질 공정을 거치는 합죽선이 명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일반인에게는 단순한 부채지만 그에겐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생활이 급속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채 만들기는 직업보다 부업수준이었다.

여름에 풀이 쉽게 상하는 바람에 부채를 만들지 않았다.

초겨울에서 이듬해 초봄까지 부채를 만들고 나머지 기간은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전주부채가 과거 명성에 비해 어깨를 피지 못하고 살 길을 찾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그래도 에어컨과 선풍기가 귀한 시절, 부채는 아름아름 판매가 됐고, 당시 전주에만 부채를 만드는 곳이 40여개 달했다.

하지만 부채의 용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보단 예술작품으로서 위상이 변했다.

위상은 올랐지만 소비가 줄어든 것은 당연지사다.

 

“조선시대만 해도 부채는 교류용품 중 제일 선호하는 것이었다.

우리 생활과 밀접하고 작품으로서 전해지고 있지만 현 정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미약하지만 전주부채의 발전을 위해 전념하고 싶다.

나 혼자 힘으론 할 수 없는 만큼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명인의 마음을 애석하게 만드는 게 바로 전라감영 선자청이다.

과거 전주부채는 전라감영에 있는 선자청에서 대량으로 만들었다.

전주부채가 유명해진 이유다.

전주시는 최근 전라감영 복원사업을 발표했는데 선자청 복원은 계획에서 제외됐다.

선자청을 복원하고 그 안에 부채 명인이 앉아서 부채를 만들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전주부채를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란 게 명인의 생각이다.

명인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팔리지도 않는 부채지만 허구한 날 만들기에만 몰두했다.

한 평생 부채를 만들며 전주부채의 맥을 잇고 있지만 실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팔기 위한 부채를 만드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돈 벌려고 맘 먹었다면 문화재가 뭐고 소용이 없다.

팔려고 작정하면 팔리는 물건만 만들면 된다.

부채 가격 올리고 싸구려 부채 만들면 돈은 들어온다.

하지만 마음을 비웠다.

바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밥은 먹고 사냐고 자주 묻는데 밥은 먹고 산다.”

 

어렵게 산 세월, 어찌 몇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전기세조차 내지 못한 세월이 몇 년이나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증 선 것이 잘못돼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됐다.

부채는 집어치우고 풀빵장사로 생계를 유지할 까 깊은 고민도 했다.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 본 선배가 아무 조건 없이 당시 거금 400만원을 빌려준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 희망이었고 빌려준 돈을 자본 삼아 부채 만들기에 전념했다.

그 뒤 전북도문화재가 되고 중요무형문화재가 됐으니 선배의 도움은 무너진 하늘에 솟아난 구멍인 셈이다.

하지만 부채 하나 선물한 것으로 은혜를 보답한 게 명인의 마음에 걸린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은 더 크게 보답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좋은 부채란 만드는 사람의 솜씨에 달려 있다.

한 눈에 느낌이 와야 한다.

어설프게 만든 것은 반드시 티가 나기 마련이다.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누가 만드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같은 쌀로 밥을 지어도 밥맛이 전부 다른 이치와 같다.

특히 합죽선은 전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부채다.

대나무 껍질로만 붙여서 만들다보니 껍질에 자연스럽게 된 코팅이 쉽사리 벗겨지지 않는다.

만질수록 윤택이 나게 된다.

머리 부분은 까칠까칠한 면이 없어야 되고 활짝 폈을 때 대나무색상이 고르게 유지돼야 한다.

부채살은 그대로 둔 채 한지만 교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소장가치가 있고 영원히 남는 작품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부채를 반 쯤 펴고 옆에서 봤을 때 마치 한 마리 새와 같은 형상이다.

그럼에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최근엔 8개월 된 후계자가 제 발로 나갔다.

생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이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이 마땅치는 않다.

가난과 고생으로 얼룩진 생활고를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 대를 이어 부채를 만들었고 아들이 뒤를 잇는 게 당연하지만 불편한 마음은 숨길 수 없다.

다만 부채 만들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하루 빨리 오기만 기다릴 뿐이다.

옆에서 침묵을 지켰던 부인이 거들고 나선다.

남들은 1년에 1,000개~2,000개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고작 20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처럼 많이 만들어 판매를 하면 좋지 않겠느냐며 수십 번도 더 싸웠다.

하지만 명인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본인 손을 직접 거친 것만이 진정한 자신의 작품이란 것이다.

손수 손으로 일일이 깎고 삶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200개도 많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재료를 사용해 대량으로 만들면 삶이 좀 윤택해지련만 그의 고집을 꺾진 못한다.

비록 고생하면서 밥은 굶지 않았는데 돈이나 좇는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다.

‘고지식하다’는 부인의 푸념이 나올 법하다.

수십 년 부채와 한 인생. 몸이 제대로 남는 곳이 없다.

하루 종일 앉아서 작업을 하다보면 극한 피로감이 밀려온다.

눈은 침침해지고 숙인 고개가 뻐근하다.

특히 손은 더 그렇다.

찢기고 배이면서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하다.

건강이 걱정스럽다.

하지만 아직까지 크게 아픈 곳이 없다고 한다.

장담하지 못해도 오늘은 괜찮단다.

그렇다.

이날 평생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다.

묵묵히 앉아서 부채만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영광스런 오늘이 왔다.

이런 오늘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어도 명인은 부채 만들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괜찮은 오늘이 계속 찾아올 때까지 말이다.

헤어지면서도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늘은 괜찮다’, ‘오늘은 괜찮다’. 항상 괜찮은 오늘이 명인에게 찾아가길 기원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눴다.

 

 



 

우리 전통 재현이자 역사 무형문화재 되기 까지···

부채 명인 외길 인생

 

김동식 선자장의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 전통의 재현이자 역사 그 자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잇고 전주부채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명인의 외길 인생은 고집스런 장인정신에서 비롯된다.

명인의 외가는 전통적인 부채 집안이다.

라학천 명인은 고종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정도였다.

외삼촌인 라이선, 라태순, 라태용 명인의 뒤를 잇는 김동식 명인은 아들까지 포함해 5대째 부채명가를 지키고 있다.

1999년 제22회 전라북도 공예품경진대회 입선을 비롯해 2002년 제7회 온고을전통공예전국공모전 입선, 2006년 제29회 전북공예품대전 입선 등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같은 해엔 제31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입선, 2007년 제30회 전라북도 공예품대전 동상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간 명인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에 지정됐다.

작업활동 뿐 아니라 다양한 전시에도 참여했다.

2005년 제2회 전주 단오 부채전을 시작으로 2007년 전주 전통 부채전, 2008년 한·중 공예 교류 전시, 서울리빙디자인페어 전주관 부채전시, 미국 샌디에이고 2008 천년전주선자장 부채전,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 초대 작가전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활발한 전시활동을 자랑한다.

2009년은 천년전주명품 in KANAZAWA 부채 전시(일본 가나자와), 2010년 폴란드 한국문화원 부채 전시, 2011년 프랑스 파리 한류박람회 전주관 부채 전시, 2012년 코스타리카 국제 예술제 한국관 부채 전시 등을 통해 전주부채를 해외에 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지난해엔 다산 김동식전, 전주부채문화관 기획전인 청마대운 부채전을 열었고 올해는 전북무형문화재 6인 부채전에 참가했다.

지난 13일엔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이 신규 지정됐고 명인이 전국 최초 보유자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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