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찬(전주교육대학교 전 총장)

오늘은 바쁘게 살았던 생활을 접고 ‘마음의 눈’을 맑게 하기 위해 운장산(1,125m)을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눈을 밝게 하기 위해 안경을 낀 사람은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마음의 눈’을 맑게 하기 위해 ‘사랑의 안경’을 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육체적인 눈에서 볼 수 있는 ‘근시’가 마음에도 적용돼 ‘마음의 근시’가 돼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기 밖에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에만 집착하다 보면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마음의 눈’을 좀 더 맑게 하고 그 동안 혹사했던 나의 육신과 영혼을 좀 쉬도록 해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운장산으로 가고 있다.

완주군 소양면 화심을 지나 성산재 고개를 지날 때, 산의 응달진 곳에는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옆 개울가에 흐르는 물소리도 지난달 가야산에서 듣던 소리보다 한결 가볍고 경쾌하게 들린다.

간간이 내 앞으로 날아가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깃털로 장식한 이름 모를 새들의 모습은 산야와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더해 줬고, 새들의 흥겨운 노래 소리는 내 ‘마음의 눈’을 맑게 해주는 것 같다.

개울을 건널 때 바위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청강수 같은 물이 바위와 부딪혀 물방울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니, 그 옛날 어렸을 때 비눗물을 만들어 비눗방울 놀이를 했던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또한 맑은 물가에는 산죽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맑은 물에 손을 담가보니 정신이 번뜩 든다.

손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계곡물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는 길에는 그 옛날 초등학교시절 보리밭을 밟아 줄 때 느꼈던 그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서릿발이 솟아있는 길을 흥겹게 밟으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나무 사이로 내려앉은 눈이 남아 있어 내가 지나갈 때 사그락 사그락 하는 눈 밟히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이 맛은 회문산에서 무릎까지 빠지며 처녀지의 눈을 밟을 때와는 달리 온화함과 생동감을 느끼게 해줬다.

이 때 나의 산행을 축하라도 하듯 비행기 두 대가 머리위로 축하비행을 하고 있다.

고마운지고․․․지상에서는 눈과 소나무와 물이, 공중에서는 각종 새와 비행기가 축하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등산로에 참나무 낙엽이 온통 뒤덮여 있다.

참나무 낙엽을 밟을 때마다 경쾌하게 들려오는 낙엽들의 교향곡이, 얼마 전에 올랐던 고덕산의 낙엽과는 다르게 여리고 맑고 긴 음율을 자아내는 것 같았다.

얼마쯤 올라갔을 때, 정상이 보이고 산죽 군락이 앞을 가로막는다.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키가 큰 산죽이다.

그 키가 2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산죽 군락 사이로 길이 하나 보인다.

그 길로 들어가니 하늘이 보이지 않아 온전한 터널이 형성됐다.

이 터널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어릴적 둔산에서 살 때, 여름방학이 되면 호밀밭에서 숨바꼭질 하던 장면으로 빠져들어 갔다.

몇 골 옆에서 숨소리도 죽인체, 숨어 있으면 술래가 지나가면서도 못 찾는다.

그 때의 쾌감과 짜릿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 밭주인에게는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미안한 일이다.

왜냐하면, 호밀대가 부러지고 짓밟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숨박꼭질이 진짜 재미있는 놀이였다.

산죽 터널을 지나 10여분 올라가니 소나무 군락이 나를 반겨줬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닙까? 소나무 숲 사이로 나있는 길에는 눈이 쌓여 있는 데, 등산객의 발자국은 하나도 없고, 간간이 토끼가 지나간 발자국이 있을 뿐이다.

소나무 잎이 떨어져 쌓여있고 그 위에 눈이 덮여 있어 그 눈을 밟을 때마다 최고급 침대에서나 느낄 수 있는 쿠션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행복감이 마음으로 전해져 눈도 맑게 해주고 피로도 씻어줘 다시 강한 힘이 솟구쳐 힘차고 행복한 발걸음을 계속할 수 있었다.

소나무 군락의 안락함을 느끼며 올라가니 또 다른 등산로와 만나게 되는데 이 길에는 인간의 발자국이 몇 개 있었다.

아마 9부 능선 쯤은 돼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온통 눈길이다.

인간들이 몇 명 안 다녀가서 미끄럽지는 않다.

눈을 밟으면 그대로 발자국이 생기며 뽀드득 뽀드득 경쾌한 음을 자아내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힘겹게 2시간 남짓 걸어서 정상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진안 일대와 동상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정상 오르면 느끼는 것이지만 올라올 때 힘들었던 것은 금새 잊고 즐거움과 행복감으로 충만해 진다.

오르막에서 힘듦을 경험한 자만이 내리막의 안락함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맛과 멋은 스스로 느껴 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 속에서 배려와 봉사가 싹틀 수 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되는 것(좋은 것) 즉, 타고난 것, 노력해 이뤄 놓은 것은 최대한 누리고 안 되는 것(나쁜 것)은 빨리 버릴(포기) 줄 알아야 되는데, 남의 눈치만 보면서 못 누리고, 미련 때문에 못 버린다면 행복해 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과감히 자기가 누릴 것은 최대한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맛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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