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입점리 고분
백제 장례문화 한눈에

완주 권삼득 생가서
소리인생 들리는듯

대왕릉-소왕릉 구분
익산 쌍릉도 볼만

임실 성수 상이암
왕건-이성계
건국 대업 계시

부안 개화도
조선 간재선생
흔적 오롯이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이 찾아왔다.

집집마다 조상을 모시고 가족들과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긴 연휴를 보내게 된다.

그럼에도 시간이 남는다면 전북 도내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를 찾아보자.

전북에서만 볼 수 있고 전북의 이야기가 배어 있는 이곳들은 멀리 타지에서 온 친인척들에게 전북의 새로운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날이 춥다고 방에만 있지말고 과감하게 신발끈을 동여매고 힘찬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보자.
/편집자주


 

△익산 입점리 고분군

입점리 고분군은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산 속 깊이 꼭꼭 숨어 있는 형태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길을 따라 도착한 입점리 고분군은 단순하게 묘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현재 사적 제347호로 지정된 고분군은 백제 중기인 서기 475년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굴식돌방형 귀족 고분으로 당시 백제 시대 장례문화를 알아볼 수 있다.

굴식돌방형, 횡혈식 석실묘, 앞트기식 등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무덤 양식은 고구려나 백제 등에서 일찍부터 사용됐던 형태로 통일신라시대나 가야 고분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무덤군은 웅진과 사비시대 백제의 지배층 무덤으로 이 일대만 해도 21기가 발굴됐다.

조사는 1986년에 처음 진행됐는데 당시 이 지역에 살던 고등학생의 신고로 위치가 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두 번째 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출토유물도 빼놓을 수 없는데 금동제 모자를 비롯해 금동제 신발, 장신구류, 말재갈, 철제 발걸이, 청자항아리, 금동 귀걸이, 유리구슬 등이다.

특히 86-1호 무덤에서 나온 고깔 모양의 금동제 모자는 일본 구마모토현의 후나야마 고분 출토품과 유사해 당시 백제와 일본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중국 남조시대 청자항아리는 중국과의 교류사실도 알 수 있다.

또 98-1호분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구덩식 돌곽무덤으로 금동제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토기 3점 등이 수습되기도 했다.

대부분 지배층의 무덤으로 이 지역 세력집단의 문화를 비롯해 익산지역의 백제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권삼득 생가

명창 권삼득은 완주군 구억리 출신이다.

조선시대 정조, 순조 때 활약한 판소리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통한다.

양반 집안 출신으로 소리공부를 하다 집에서 쫒겨난 일화가 있다.

누구에게 소리를 배웠는지 정확한 계보는 전해지지 않지만 판소리 ‘설렁제’란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는 높고 길게 질러 내는 것으로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무가(舞歌) 계열이 하는 소리를 양반이 하니 그를 가르쳐 비가비 명창이란 칭호도 얻게 된다.

생가터는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

생가터 옆엔 ‘권삼득 생가터 보존위원회’란 팻말도 볼 수 있으니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생가터 안내문엔 ‘조선후기 판소리 대명창인 권삼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해 삼득이라 불리었으며 본명은 정이다.

양반출신 광대로 새타령을 하면 숲 속의 새가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는 글귀를 볼 수 있다.

뒷산으로 오르면 권삼득 명창의 묘와 소리굴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시절 소리연습을 했다는 조그만 굴인데 한 사람이 들어 않을 정도의 규모다.

명창은 이 곳 뿐 아니라 소양면의 위봉폭포나 남원 육모정 등에서 소리연습을 했다고 한다.

조금만 더 오르면 권삼득 명창 묘가 나온다.

정갈하게 정리된 묘 앞엔 묘 주인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묘비에는 ‘소리가 좋아 소리를 위해 태어난 인생이라 양반도 싫고 벼슬도 싫어 오직 소리와 더불어 살다 간 비가비 권삼득 명창, 한많은 세상 맺히고 서리 애환 접어두고 여기 고이 쉬나니’라 적혀있다.

 

△익산 쌍릉

최근 많은 관심을 받았던 익산쌍릉은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분된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며 남향으로 향해 했다.

1917년 발굴 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형의 묘를 지키는 바위 흔적이 있으며, 내부에는 석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이미 도굴된 터라 주요 유물은 사라져버린 상태다.

대왕릉은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세웠고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있다.

소왕릉은 대왕릉과 비슷한 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발굴조사 이전에 도굴당했으나 부패된 목관과 토기 등이 수습돼 현지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출토유물과 규모 및 형식이 부여 능산리 고분과 비슷해 백제 말기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8년 사적 제408호로 지정됐고, 인접한 미륵사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 등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쌍릉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삼국유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 마한의 왕릉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1917년 발굴 조사후 백제말기 왕족의 묘로 추정했고, 광복이후 백제 30대 무왕과 그 부인의 무덤일 가능성에 높은 것으로 학계에서는 정리가 됐고 거의 정설화됐다.

최근엔 쌍릉 출토 고고자료 정리와 비교 분석을 한 결과 소왕묘가 먼저 축조됐고 대왕묘는 624년에서 639년 사이 만들어 진 것이란 의견도 제시됐다.

이럴 경우 쌍릉은 무왕이 생존했던 시점에 조성된 것으로 무왕 부부의 묘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임실 상이암

상이암이 위치한 임실 성수산은 예부터 명산으로 불린다.

아홉 마리 용이 구슬을 물려고 다투는 형국이라 해 구룡쟁주지지(九龍爭珠之地)라 했고, 여덟 왕이 나올 길지라 일러온 명산이다.

신라말 도선국사는 이 산을 둘러본 후 도선암을 창건했다.

이후 이곳은 왕의 길지를 받고자 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다.

왕건과 이성계가 그렇다.

도선국사 권유로 왕건은 이곳에서 백일기도 끝에 고려 건국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계시를 받게 된다.

그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환희담이라 비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고려말엔 이성계가 이곳을 찾는다.

무학대사 권유로 이성계도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니 하늘에서 ‘성수만세’ 소리가 세 번 들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삼청동이란 글씨를 새기고 이름을 도선암에서 성수암으로 고쳐 불렀다.

이후 이성계는 자신이 삼청동이라 쓴 바위를 어필각을 지어 보존하게 했으며, 비각 뒤 바위는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향해 모여드는 형국이라 해 기도터로 잘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상이암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삼청각이라 적혀진 비석이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으며, 왕건이 새긴 환희담 바위는 현재 칠성각 앞에 놓여 있다.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도 바로 옆에 있는데 전북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은 문 방향이 남향이고 아미타불은 서쪽을 등진 채 동쪽을 바라보고 놓여 있다.

참배자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하게 되는데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무량수전 바로 앞엔 눈길을 끄는 화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15m 정도의 상당히 큰 키로 몸통은 하나요, 중간에서 아홉가지가 뻗어져 나간 형태다.

화백나무 밑에서 설법을 하는 스님 모습이 바로 부처 모습 그 자체다.

 

△부안 개화도

계화도 이른 아침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계화교 바로 앞에 일렬로 서 있는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담기 위해서다.

계화도는 이름 그대로 변산반도 북쪽에 위치한 섬이었다.

1963년부터 68년까지 방조제가 조성이 되면서 육지화되었고, 주변의 간석지는 2,741h에 이르는 농경지로 변화됐다.

때문에 일반사람들에게 계화도는 대규모 쌀이 생산되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다.

바다를 막아 생산된 쌀이 맛이 좋아 ‘계화미’는 최고의 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쌀 뿐 아니라 조선말 마지막 유학자 간재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간재 선생은 1912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과 학풍을 숭상했던 간재 선생은 여러 관직을 물리치고 계화도에서 제자들과 함께 말년을 보냈다.

간재 선생은 성리학의 대가인 임헌희의 제자로, 1910년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 계화도에 들어와 후학양성과 항일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가 학생들과 학문을 토론하면서 사용됐던 강당 ‘계화재’와 위패를 모신 ‘계양사’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특히 계양사는 간재 선생이 세상을 뜬 지 11년 뒤인 1933년 제자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계화재와 계양사를 포함한 이곳을 간재 선생 유지라 불리며 전북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됐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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