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임실호국원에서는 지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사랑 시 공모전’을 열었다.

‘시’라는 단일 장르로 국립묘지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라 작품이 접수되려나 걱정했었는데, 5백편이 넘는 작품이 접수되어 놀라웠다.

지역과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접수된 작품들을 관통하는 내용은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나라사랑 하는 마음’이었다.

시 공모전의 우수작 시상식을 마치고 수상자들이 자신의 시를 설명하는 시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이 떠올랐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6․25 전쟁의 아픔을 역사로 인식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시의 구절을 보며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난 날은 다들 잘 알고 있어도, 7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각급 학교를 방문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면, 학생들이 7.27 정전협정과 관련된 문제를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올해 6․25전쟁 69주년,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6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정전협정의 배경과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경상도 일부 지역과 부산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부산밖에 남지 않았던 위기에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이 1953년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을 비롯한 195만 유엔군과 90만 국군이 합심한 결과였다.

6·25 참전 당시 유엔에서는 전투파병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 총 22개국의 병력을 우리나라에 파병했으며, 당시 참전국은 상당한 인명피해와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전쟁으로 전투에 참여한 195만의 유엔 참전용사들 중 4만 여명이 전사하고 11만 여명이 부상, 실종되었다.

우리 국군은 15만 명이 전사했으며, 13만 명이 실종되고 7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름도 몰랐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쓰러져간 유엔 참전용사와 우리 호국영령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중국군, 북한군 대표가 휴전 조인문에 서명하며 전쟁은 중단되게 되었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종전과 다르다.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이 협정 이후, 남북한은 70여 년간 각자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세계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기적적인 경제발전과 성숙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토대는 정전협정 이후의 지속적인 안정상태였다.

여기에 의미를 둔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참전국,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에 감사하고 동맹국과의 우호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2013년,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하였다.

이후 매년 정부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국가보훈처 산하 각 기관에서도 자체 기념행사를 마련하여 시행 중 이다.

우리가 7월 27일을 기념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90만 국군과 195만 유엔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바로 그들이 지켜낸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통일을 이루게 될 그 날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되리라.

해마다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22개 참전국기와 유엔기, 푸르른 묘역의 길 양 옆에 펄럭이는 깃발 앞에 다시 한 번 우리의 꿈과 희망, 감사의 마음을 내려놓는다.

/국립임실호국원장 윤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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