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니 중학교시험에서 낙방해 재수·삼수하던 형들과 같이 공부했다.

우리 때부터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더니 뺑뺑이 추첨이 시작됐다.

바로 평준화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서는 고등학교가 학군제로 ‘추첨식’으로 평준화되면서 고교시절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이 전면 금지됐다.

우리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갔는데 내가 반에서 83번이었을 정도로 콩나물시루 교실이었던 것이다.

추첨으로 고교를 배정받았다.

음악·미술을 제외한 교과목이 예비고사 과목이었으므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외었던 393자의 국민교육헌장처럼 “오등의 자”로 시작하는 3⋅1운동 선언서, “나랏말싸미”로 시작되는 108자 훈민정음을 비롯, 전 과목을 준비하느라 다 외웠다.

도시락 분식 검사, 성적 떨어지면 무조건 맞고, 학도호국단 교련교육의 비중이 제일 높았다.

백여만명이 지원한 대학입시를 체력장까지 포함된 사지선다형의 예비고사로 전국 대학 정원의 2배인 30여만 명 정도를 선발해 본고사를 봤다.

현재 학종 등의 여러 방법이 없고 오로지 예비고사·본고사 밖에 없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공부를 여유있게 하다가 2학년 2학기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됐다.

이리하여 응시생의 14%인 14만 명이 대학 갔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대졸자 10만 명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 10만 명 졸업생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래서 77학번, 땡칠이 학번, 58년 개띠의 무리에 합류했다.

입학부터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데모했다.

공대생이었던 필자는 문과생에 비해 데모 참가를 덜했다.

데모에 열성이었던 문과생 내 친구 중 한 명은 어느 데모에서 전경에 포위됐으나 웬일인지 놓아 주더란다.

그때 잡혔던 친구들은 군대 가거나 구소됐었다.

바로 엄마생각 나서 데모를 그만 두었다 한다.

그때의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못 한 것이 지금까지 미안한 구석이 있다.

그 친구는 결국 번민 끝에 이민갔다.

그리고는 영원할 줄 알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

김일성도 죽었다.

이런 민주화운동에 행불자가 400여명 그리고 분신자가 70명에 육박했다.

대학 4년 동안 휴교, 휴학, 휴강을 밥 먹듯이 했지만, 졸업했다.

그때부터 조국근대화와 산업화의 기치를 안고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만 했다.

돈 될 수 있는 것은 다 만들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2002한일 월드컵도 성공적으로 치루고, 우리나라 물건을 팔 수 있을 곳은 전 세계 어느 곳이건 다 팔았다.

대부분이 역공학 (逆工學, reverse engineering)이었다.

일본상품·미국상품 갖다 놓고 베끼고, 더 잘 만들어서, 더 싸게 팔았다.

그리고는 90년 초반에 유학에 갈 기회를 얻어 합리적이며 경제대국이었던 미국을 가보니 우리나라는 20년 이상 못 버티고 망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곧 IMF가 터져서 이 확신이 맞는 듯하였으나 반대로 미국과 일본이 망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최상위에 랭크되는 경제대국이 됐다.

지금은 우리기술이 세계 제일이다.

우리나라처럼 살기 편한 나라가 없다.

제일 깨끗하고 제일 좋다.

우리만 모를 뿐이다.

이러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던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우리 58년 개띠, 땡칠이 77학번 대부분은 올해 말이면 정년 퇴직한다.

모임에서는 만날 때마다 부모님들의 건강을 묻는다.

대부분이 다들 모시거나 요양병원에 모시는 효자들이다.

그러면서 자조한다.

우리 자식들한테 이런 대우받겠느냐고 서로를 웃는다.

그리고 쉬지 않고 달려왔던 40년을 회상하며 우리끼리 이야기한다.

77학번들이여 자랑스러웠다고.

그리고는 다짐한다.

우리 후손에게만은 우리와 같은 고생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물려주겠노라고.

/강길선 전북대고분자나노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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