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청소 일을 하던 70세가 넘은 노모(老母)는 어느 날 오후 딸 이름으로 표시된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엄마, 내 휴대폰이 고장 나서 직장 동료 휴대폰으로 문자 보내는 거니까 전화는 안 되고 문자로만 대화해야 해. 알았지?” 딸의 메시지라 노모는 그러려니 하면서 알았다는 답문을 보냈고, 이렇게 모녀간의 메시지 대화는 상당시간 계속되었다.

“회사 행사 준비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밖에 나왔는데 엄마 카드로 계산하면 할인이 된다니까 그렇게 해도 되지? 엄마가 가지고 있는 카드 앞뒤 사진 찍어서 비밀번호랑 같이 보내줘. ”노모는 딸이 원하는 대로 보내줬다.

다른 자녀들보다 믿음이 많이 가던 딸이라서 특별히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카드가 잘 안되니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내달라는 메시지가 떴고, “왜 이리 귀찮게 구나?” 생각하면서도 주민등록증을 찍어서 보내줬다.

노모는 집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딸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문자로 대화를 하며 집에 도착해 보니 딸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서야 노모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은행에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가해자는 노모 명의의 통장에서 상당한 금액을 인출했고, 피해자인 노모가 가입한 보험에서 약관대출까지 받아 빼낸 뒤였다.

뿐만 아니라 노모 이름으로 휴대폰을 개통하고 계좌까지 만들어 다른 보이스피싱 피해자들로부터 입금을 받아 돈을 빼갔다.

경찰의 조사를 받을 때 노모는 이미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보이스피싱을 당하면 피해자인 동시에 뜻하지 않은 선의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위 사건과 같이 개인정보가 넘어가 도용된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신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일단 가해자가 되면 대부분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

고소인 신분으로 수사기관에 진술을 하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자신이 가해자로서 조사를 받게 되면 아무런 죄가 없더라도 걱정과 불안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자기 돈이 빠져나간 것만 해도 마음이 쓰린데 가해자로서 조사까지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보이스피싱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수사기관의 조사와 별개로 금융기관으로부터 금융거래의 제재까지 받는다.

수사가 종료되어 죄가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통장 개설이나 비대면 거래가 어렵다.

보이스피싱과 관련된 계좌에 자신이 입금한 예금 잔액이 남아 있더라도 마음대로 인출하지 못한다.

약 1년 정도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위 사례에서도 노모는 잔액만이라도 딸의 결혼비용으로 쓰려고 했지만 보이스피싱에 이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금을 찾을 수 없다.

노모는 이미 빠져나간 돈은 포기하더라도 하루속히 “가해자”라는 불명예만은 벗고 정상적인 금융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통해 범죄자를 엄벌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가해자의 누명을 쓴 피해자가 범죄자로 몰리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

피해자의 계좌가 피해자 몰래 이용되었음에도 무조건 피의자로 입건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또한 가해자가 된 피해자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사건보다 최대한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사실관계와 정황 등을 보면 순수한 가해자인지, 아니면 피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가해자가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신속하게 종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피해자에게 죄가 없고 피해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함으로써 피해자를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도 국가의 책무다.

금융기관에서는 피해자가 된 가해자가 정상적인 금융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수사종결 전이라도 적극적으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수사기관으로부터 수사종결 통보를 받고도 미적거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법 개정과 제도 개선을 통해 뜻밖의 가해자가 된 피해자를 구제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로문 법학박사·민주정책개발원장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