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月下情人)"은 조선후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작품명이다.

혜원은 단원(김홍도)과 겸재(정선)와 함께 "조선후기 3대 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원래 산수화를 익혔다.

특히 실경산수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금강산 8폭 산수"나 "을밀대 풍경" 등은 지금도 화중화(畵中畵)로 꼽는다.

그러한 그가 중년을 넘기면서 지친 심신을 쉴 겸 일상에서 흔히 보는 풍속화 몇 점을 그린 것이 요즘말로 대박 남으로 인해 이후 줄곧 풍속화, 주로 여인들의 일상을 그려 냄으로서 혜원은 여인전공 화가로 각인되고 있다.

"빨래터의 아낙네들" "그네 타는 여인" "목욕터" 등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생활풍속을 소재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텃치와 필력을 구사하여 그려낸 그림은 지금껏 서양화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혜원의 많은 작품 중 필자는 "월하정인"을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작품 자체로 무한한 상상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혜원은 어쩌라고 이렇게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림을 그린 것인가.

깊어가는 달밤에 봉선화 꽃물처럼 번지는 등불을 들고 다정히 걸어가는 두 연인은 자신이 겪은 데이트 체험인지 아니면 타인들의 연정이 부러워서 그려낸 작품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달밤에 숨어들 듯 담벼락을 끼고 걷는 두 남녀는 신분의 격차로 양가에서 반대하여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에이는 연인사이인가 아니면 지체 높은 선비를 지순하게 연모하는 기녀를 애틋한 마음으로 달래주며 걷는 남녀인지 그도 모를 일이다.

또는 부잣집 막내아들 난봉꾼이 어느 기방에서 주색잡기에 지쳐 쓰러졌다가 새벽녘 깨어났음에 막내기생이 집으로 바래다주는 정경을 그렸음인지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의 제목 "월하정인"에 깃들인 화제(畵題)에 쓰였듯, "양인의 심정은 양인만이 알 것이다" 하였는바, 그림 속에 있는 두 연인의 정체와 그들 사이에 얽힌 속 깊은 사연은 오직 그들 둘 만이 알 뿐 그 누가 알 것이며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겠는가.

요즘이라면 청문회도 할 수 있을게고 주민 소환제도 할 수 있으련만 이것은 남녀 간에 이루어진 은밀한 사랑의 궤적인지라 규제할 수 없는 예술의 세계인 것을 어쩌랴.

다만 우리는 옛 선인들이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다양한 예술적 소재를 발굴하여 이렇듯 애절한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뿐이다.

근래에 TV나 신문 등 매스컴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성추행, 성폭행 그리고 위력에 의한 폭언, 폭행 등등 눈살 찌푸려지는 뉴스들로 인해 매스컴 대하기가 짜증날 정도다.

특히 성추행, 성폭력 등의 가해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지도층으로 알려진 분들임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분들이 그 위치에 이르기까지 피땀 어린 노력으로 공부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원만한 가정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임에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신앙처럼 믿고 의지해왔을것인데, 직장에서의 엉뚱한 일이 사회적 큰 사건으로 터졌을 때 그분들을 하늘같이 믿었던 가족들과 친지들이 받는 실망과 상처는 그 어디서 무엇으로 씻음을 받는다는 말인가.

누가 뭐라 해도 사랑은 아름다워야 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은 상호간의 신뢰와 존경이 애정으로 승화될 때 아름다운 것이지 일방적 억압과 위력에 의한 제압으로 쟁취코자 하는 남녀관계는 추악하고 비열한 악해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남는 것은 미움과 증오에 얽힌 상처뿐임을 왜 모르는지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제발 더 이상 사회지도층이나 저명인사들이 아름답지 못하고 애정 없이 빗나간 사랑으로 선량한 다수의 민중들에게 실망어린 상처를 안겨주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고 소망한다.

부디 혜원 신윤복님의 불후의 명화(名畵) "월하의 정인" 처럼 지순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겨울 눈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추억어린 사랑이 세상의 도처에서 많이 일어나 들불처럼 번지는 순수한 낭만과 어여쁜 로맨스가 우리들 가슴을 설레이게 해주길 시린 마음으로 소망한다.

/오석주 한국효도회 전북지부 부회장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