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닫힌 사회에 대한 학자의 통렬한 반성

중국 성리학 신분구조 고착화 병폐
사상변화에 따른 국가흥망성쇠담아

5호 16국 시대가 끝나고 수당 제국, 즉 선비족 황제 시대가 열립니다.

한족 입장에선 전란이 오래 지속되어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만, 선비족 출신 황제는 문약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이미 5호 16국 시절에 들어온 불교가 융성해지고, 마니교, 경교, 이슬람교 등도 용인되어 유교가 주된 통치 이념이 대두되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과거로 등용된 인재를 배치하여 귀족 세력과 대립시키며 황권을 강화합니다.

그래서 당나라 중기까지는 불교가 융성하고 많은 관리들도 해박한 불교 지식을 보입니다.

당 후기에는 도교가 상대적으로 융성해지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배 계급은 황제가 죽어도 상복을 처음엔 3년을 입어야 한다 하다가, 27일만, 그러다 3일만 입는 것으로 매우 실용적 사고를 보입니다.

 5대 10국을 지나 송대가 되자, 정통성에 대한 문제로 조광윤부터 지방 호족을 겸한 유교 세력과 연합하고, 주희의 성리학이 융성합니다.

성리학은 변증법과 유사한 측면을 보이는 데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성리학의 우세는 신하들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족벌 귀족적 성향을 보여 신분 세습의 강화와 문약으로 흐르게 되는 사회 분위기를 보이게 됩니다.

이를 위해 禮를 표방하고 禮에 의한 신분구조를 고착시키는 병폐를 보입니다.

이는 조선 후기와 아주 유사합니다.

문약한 지배 정권이 야비한 그들의 사고를 감추기 위해 통상의 지식이아닌 성리학을 표방하고 禮을 주된 이념 또는 통치 논리로 삼습니다.

주희와 대척을 보인 유학자로 육구명이 있는데, 그는 선불교의 돈오의 방법론을 일부 차용하여 순간적인 깨달음에 의해 理를 이룰 수 있다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마이너한 위치에 머무릅니다.

 몽골의 정복으로 성립된 원나라는 유학에 대해 매우 적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전의 야만족 정권과 달리 한족 관리의 등용보다는 금나라를 정벌하는 데 도움을 준 거란족의 요나라 귀족 등이 등용되는 상황이라 이후 많은 지방 호족 겸 유학자들이 명나라 건설에 도움을 주게 되었답니다.

요는 원나라 때는 사상사가 없다시피하게 됩니다.

한족 중심으로 성립된 명나라는 중기까지 주희의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나, 육구명의 방법을 계승한 왕수인에 의해 그의 호를 딴 양명학이 유학의 한 주류로 올라섭니다.

그러나 통치 이념의 주류는 계속 성리학이 차지합니다.

여진족이 통치한 청나라는 성리학의 득세를 막기 위해, 오로지 옛 문헌의 해석에 좌우되는 고증학을 표방하여 신하들의 성리학적 논리 전개를 사전 차단합니다.

오로지 고문헌에만 의지하는 해석을 보여 사상적 통제를 이룹니다.

추사 김정희가 청말기에 중국 유학자와 토론하여 학식을 널리 알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 된 것은 추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성리학을 말 할 수 없던 중국의 분위기 때문이었는 데, 요즘 말로 지나친 국뽕이라 하겠습니다.

청초기 현명한 군주 강희제 때, 마테오 리치에 의해 전래된 西學을 인정하려 헀으나 유교적 신분 질서를 뒤집을 수 있어 도입하지 않았으나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서구에 유린당하고 서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반성한 것은 청일전쟁 패배의 치욕이 계기였으며, 이후 유학을 버리고 당시까지 서랍 속에 봉인했던 제자백가가 다시 조명받고 수많은 아픔을 거쳐 현재에 이릅니다.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수용한 후에 수직적 신분 구조를 고착시키려는 봉건적 행태를 지속하다, 이민족 지배층이 올라선 당나라 초기의 건강함에 잠깐 영화를 누리나, 이를 잃은 이후 과학 마저 하류로 전락하고 후진국에 이르게 됩니다.

이 책은 닫힌 사회에 대한 학자의 통렬한 반성으로 보입니다.

저는 자꾸만 공산주의를 수동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는 거자오광 교수의 저작을 제법 읽어서 받게 된 저만의 기분입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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