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는 많은 건축물들이 있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유물과 유적이 남아 그 도시와 지역을 대변해 준다.

도시건물은 세기를 넘어 역사가 되고 과거 시대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것을 예술의 힘이라고 말하기에는 억지스럽지만 후대를 사는 사람들은 상징과 의미를 불어넣어 생명을 준다.

따라서 현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집 한 채, 건물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와 고민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에서 전북은 지명도가 약한 편이다.

특이점이 없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전북은 한 번도 백제 아닌 적이 없지만 백제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가 최근에서야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세력으로 등장했다.

고려에서는 뚜렷한 근거도 없는 ‘차령이남설’을 내세워 우리 지역의 인물이 정계에 등장하는 것을 부정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본향이라고 하면서도 반대로 조심스럽게 경계당한 도시였다.

이런 사정에 대해 남의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지역을 터부시한 까닭이 크다.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우리들 시간이 조선의 시간이었고, 우리들 이야기가 조선의 이야기였으며, 우리들 활동이 조선의 활동이었고, 우리들 눈물이 조선의 눈물이었고 우리들 생활이 조선의 역사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은 성리학을 앞세운 도덕국가였다.

즉 명분이 있어야 했으므로 신분으로 모든 것이 수단화 되었다.

특히 양반에게 집중된 신분제도는 태어나면서부터 한손에 권력(칼)과 다른 손엔 재력을 쥐었고, 입에는 명분을 가지고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신분사회와 부조리에 대해서 과감하게 도전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정여립이다.

본인 스스로 사회적 권력을 가진 양반이었으며 벼슬아치였으니, 당시 사회에서는 큰 모순이고 반역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시대건 혁명가와 사상가는 백성을 등에 업고 나타난다.

정여립이 주창한 것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이었고, 애민정신으로 발현된 대동사상이었고 평등사회였으며, 당시 모순된 사회의 제도적 개혁이었다.

그러나 정여립은 결과적으로 패배자가 되었다.

그가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밀고로 인해 그와 관련된 전국의 모든 선비들에게 엄청난 고난이 뒤따르게 되는데,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부터 그의 일가친척과 동문수학자들과 학문적 혹은 이념적 뜻이 비슷한 사람들이 해당된다.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은 전북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천여명의 선비들이 죽게 된다.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다른 사화와 옥사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다 합해도 이만한 희생자가 못되었으니 호남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정여립이 주창한 사상과 그의 죽음으로 인한 우리 지역의 변화이다.

정여립은 임금에게도 뜻이 맞지 않으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금구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조직해서 백성끼리 평등하고 협력하는 인정 넘치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양반만이 아니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하고 대동계도 참여시켰으며 경직된 신분사회에서 수평적 이념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이념과 사회성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관료와 양반에게는 그들에게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다고 할 수 있는 무서운 질병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정치력이었다.

정치세력은 서로에게 이익을 위해 다툰다.

그러자면 당연히 누군가 희생자가 있어야 했다.

그 대상이 정여립이었다.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 다투던 당쟁에서 정여립은 정쟁의 목표이며 제거대상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정여립이 꿈꾸었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회상의 모순이 되었고 심지어 역모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가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던 아름다운 풍속과 평등과 공화주의적 사상과 정치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가 조직했던 대동계는 왜구를 물리치고 남원지역과 우리지역을 지켜냈던 힘이 두려웠던 정적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정여립이 정적에게 패배 한 후 정치세력은 판도가 바뀌었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에서의 선비가 과거에 오르는 일은 더 어려워졌고, 인재들이 한직에 머물러야 했으며, 관직에 나가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임진·정유재란에 정여립이 살아있었다면 쉽게 끝날 전쟁이었다는 참언이 민중들에게서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죽고 없었다.

선비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그의 달변과 혜안이 담긴 사상을 토론하고 싶었다.

관직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선비들은 변해갔다.

과거에 대한 꿈에서 풍류를 즐기게 되었다.

점차 성리학적 학문에서 예술적 감성을 키우며 다양한 장르에 영향이 미쳤다.

호남의 판소리와 음식과 놀이문화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발전한 문화예술은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가장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정여립의 사상이 백성들에게 전해져서 비록 꽃은 피워보지 못했지만 실학사상이 우리 지역에서 태동되었다.

그리고 모두같이 평등하게 살아보자는 대동사상은 실학사상으로 발전했고 실학을 바탕으로 훗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압재와 폭거에 항거하는 지역정서는 한순간에 생기는 것은 무리다.

오랫동안 토론하듯이 회자되어 무르익어야 정서가 되고 풍습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달된 사상은 동서양에서 가장 앞선 지역이 바로 우리 지역이다.

공화주의! 요즘말로 민주주의 성지가 바로 우리 지역인 셈이다.

그런데 아직도 정여립은 선각자나 사상가가 아니고 더구나 희생자도 아닌 역성을 꾸민 반역자로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고 우리 지역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지역은 차령이남설에 동화되어 정여립 같은 역성혁명가가 나왔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게 물의 순리인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지역이 있다하여 부정적인 지역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분위기를 타파하고 인식을 전환할 때가 되었다.

전북과 전주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긍정적인 관광지로써의 역할을 알려줄 깨가 되었다.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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