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화약 폐정개혁안 수락
日 철병 무시 군국기무처 설치
동학농민 우금치전투 日에 져

북해도대학서 동학지도자
유골 발견 2019년 안장행사
동학정신 계승-발전 이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차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아는 분들이 많지만 2차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조선 정부가 청나라군에게 진압을 도와달라는 국서를 보냅니다. 

이에 청나라는 5월 5일 아산만에 도착하는데 일본이 톈진조약을 빌미로 5월 6일 일본군은 인천에 도착합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빠른 문제해결을 위해 양국이 서로 철수하고, 농민들의 폐정 개혁안을 받아들이게 되니 5월 8일 전주화약은 이렇게 맺어집니다. 
 

# 반외세 운동으로 번진 2차 동학농민운동 

전주화약은 농민들이 개혁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든 조약입니다.

 폐정개혁안을 수락함으로써 동학농민군은 스스로 해산했고, 농민의 자치기구 집강소와 자주개혁을 추진하는 교정청을 설치해 폐정 개혁안을 실시합니다.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개혁에 발판이 되었던 개혁안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분노를 잠시 가라앉힌 조선 정부는 양국의 철병을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했습니다. 

군국기무처는 조선 정부를 초월한 입법회의 기구로써 관제를 개혁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관청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친일 내각을 키워 내정간섭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청군은 지원 병력을 아산으로 보냈으나 일본은 안산 풍도에서 청나라 군함을 격퇴하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됩니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죠.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청일전쟁이 일어나며 당시 조선 상황은 혼란스러웠고, 반봉건을 내세웠던 동학농민군들이 이번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반외세를 내세우며 봉기를 일으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교도들이 모이니 규모가 20만 정도 달했다고 전해지며, 이들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과연 동학농민군들의 운명은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요?

2차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유적지는 완주 삼례와 김제 원평, 남원 교룡산성을 제외하고 전개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들의 운명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전주 완산 칠봉 위에 있는 녹두관입니다. 


 

# 힘든 세상은 저물고,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완산 칠봉에 있는 녹두관은 우거진 숲속 안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요. 

녹두관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목적으로 세워줬으며, 이는 일본에서 돌아온 무명의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전시관입니다.

2019년 6월 1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 행사를 거친 후, 그의 유골이 이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녹두관에 무명 지도자의 유골이 모셔진 만큼,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12개의 폐정 개혁안과 이를 설명해주는 거대한 영상 스크린. 

그리고 1년간의 봉기 전개를 길게 이은 연표까지 연표의 종착지에 도달하면, 추모공간이 눈앞에 들어옵니다. 
      
2차 동학농민운동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끝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양으로 북상하던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릅니다. 

농민군의 기세는 이전보다 더 컸지만 화승총과 죽창을 들고 싸우는 농민군들은 기관포와 대포 같은 신식무기를 사용하는 일본군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남쪽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봉기를 이어나가게 되었죠.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된 후부터 급속도로 기세가 꺾였고 1895년 1월 일본군과 관군에 발각되어 모두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진압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목을 잘라 고국에서 인종학 연구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중 하나가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되었고 유골을 1995년에 모셔와 2019년 녹두관에 안장 인사를 했습니다. 

고국의 흙냄새도 맡지 못한 채 100년간 차가운 공기가 퍼진 대학 창고에 있었던 지도자를 추모하며 전시관을 관람했습니다.

유골이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었다는 사실은 유골에 적혀있던 글과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06년 진도에서 붙잡혀 처형당한 지도자의 수급으로 확인되었으며, 유족을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긴 조사를 진행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전해져 안타까웠습니다. 

전시관에 나오고 나니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장을 보니 하늘을 볼 수 있는 창이 있었고, 이는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넓은 전주의 전망이 보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전통적 봉건 사회상을 향한 반기를 내세우며 일어난 민중운동으로써 백성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급진적 개혁 운동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외세의 탐욕으로부터 당당한 나라를 만들고자 자신의 삶과 다소 먼일임에도 외세에 맞서 싸운 사람은 바로 민중이었습니다. 

힘든 세상은 저물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후천개벽은 동학의 기틀을 잡아준 사상이자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역사를 평가할 때는 그 시대를 기준으로 평가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은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산이 수십 번, 수백 번 바뀐 지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구름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녹두관이 개관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쾌적하고, 설명을 도와주는 영상 구성이 잘 되어있어 역사 공부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이곳은 무명 지도자가 모셔진 추모공간입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갈지도 나올 때만큼은 내가 들이마시던 공기가 이렇게나 가벼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곳. 

이곳은 녹두관, 동학농민운동이 다시 뜨겁게 울리는 곳입니다.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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