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인 화호리 지난달 개관
구마모토 호남 최대 지주
쌀창고 근대역사관 탈바꿈
일제강점기 사진-영상 전시
구마모토 저택 日다다미방
화호자혜진료소 소작인치료
아카키 공장 생활문화센터
사택-창고부지 카페 활용
아리랑문학마을 등 볼거리

다크 투어리즘(블랙 투어리즘)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어둡고 우울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체험하며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합니다.

1899년 군산항의 개장과 더불어 호남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는데요.

강제 병합이 된 후, 호남평야는 일제 강점기 쌀 수탈의 거점으로, 곡창지대였던 신태인 화호리도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2021년 7월 개관한 정읍근대역사관에 방문해, 화호리의 아픔과 상처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 구마모토 쌀 창고, 정읍근대역사관으로!

구마모토 리헤이는 합방 전 전북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지주입니다. 구마모토는 일본 본토에 거주하며 농장이 있는 정읍 화호리와 군산 옥구 일대를 시찰했는데요. 1937년 주식회사 웅본 농장을 창설하며 5개 군 26개 면에 대토지를 소유한 호남 최대 지주가 되었습니다. 현재 파출소 역할을 하는 지서가 구마모토 농장 앞에 한 개 더 있었는데, 당시 면 단위에 지서가 2개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합니다. 구마모토는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독부에 지서 개설을 요구하고 운영비까지 부담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재력가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구마모토는 생산한 쌀을 보관하기 위해 다섯 동의 쌀 창고를 지었습니다. 6.25 전쟁 때 4동이 소실되고 현재는 1동이 남아 있습니다. 창고는 해방 후 화호 중앙병원, 화호 여자중학교로 쓰이다가 지금은 정읍 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새 건물 같지만, 오롯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근대역사관 앞에는 넓은 주차공간이 있고 키 큰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 있습니다. 예전 건물의 기둥으로 쓰이던 돌기둥을 이곳 나무 옆에 세워 두었습니다. 건물을 받치기 위해 새로운 화강석 기둥으로 교체하고, 철거한 기와가 부족해 양쪽 끝에 새 기와를 얹었다고 해요. 지붕에 얹은 기와를 잘 살펴보면 색깔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시관으로 입장하는 문은 계단 뒤편에 있습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2층 공간은 이직 제 역할을 찾지 못했습니다. 입구에 앉아 맞아주시는 분은 문화해설사인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문화해설사와 같이 관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내부에는 화호리 일대의 일제 강점기 잔재가 사진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영상을 보고나서 전시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직 생존해 계시는 어르신의 육성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는데요. 소작료를 주고 나면 먹을 것이 없어서 싸래기로 연명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픈 과거를 너무 잊고 사는 건 아닐까요? 영상을 보며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밀도 있는 역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전시관에는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해설이 없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장소가 있었는데요. 화장실 맞은 편 2층으로 가는 계단 참에 있는 우물입니다. 문을 닫아두어 지나치면서는 보이지 않는데요. 병원으로 사용될 당시 세탁부가 여기서 빨래를 했었다고 합니다. 

 

▶ 화호리 골목은 무언가 특별하다.

화호리는 ‘벼가 호수를 이룬다’는 곳으로, 호남선이 개통하기 전까지 일대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중 용서 마을은 개가 잠을 자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숙구지’라고도 불렸는데요. 근대역사관이 있는 곳은 개의 입에 해당합니다. 개는 입이 따뜻해야 잠을 자고, 사람은 발, 소는 등이 따뜻해야 잠을 잘 잔다고 하는데…… 구마모토는 풍수라도 보았는지 개의 입에 해당하는 명당자리에 건물을 앉혔습니다. 

전시관을 나와 향한 곳은 구마모토 저택입니다.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등록문화재 215)로 구마모토가 조선에 방문할 때 머물기 위해 지은 집입니다. 2동의 집이 연결된 구조로, 앞쪽에서 보이는 곳이 구마모토 일가를 위한 공간, 뒤편에 연결된 곳에 일본인 경리과장이 거주했습니다. 현재 이곳은 게스트하우스로 쓰기 위해 개·보수를 마치고 준비 중입니다. 

내부는 전형적인 일본식 다다미방입니다. 문을 열면 개방감이 생기고, 문을 닫으면 개별적인 공간이 됩니다. 구마모토가 호신용으로 소장하는 긴 칼을 두었을 만한 수납공간도 있었는데요. 소작농의 굽은 등과 굳은살, 서슬 퍼런 일본인 지주의 행태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뒤편으로 이어진 관리인의 공간은 구마모토 일가의 공간보다 작고 소박합니다. 부엌이 달린 것으로 보아, 구마모토 일가가 방문했을 때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그의 업무가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저택 양옆에는 정원과 농산과장 사택이 있습니다. 200년도 더 된 노거수는 이곳의 역사를 또렷이 보았겠지요? 구마모토가 방문했을 때마다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와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무는 마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 이심전심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구마모토는 소작인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 옥구군 개정에 본소를, 1939년 화호리에 ‘화호자혜진료소’라는 지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ㄱ’자 건물은 훼손되고 지금은 ‘ㅡ’자 건물이 되었고, 그나마 지붕도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재는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어서 밖에서 보기만 했는데요. 근대 농촌 보건의 역사가 담겨 있는 현장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본인 고바야시가 운영했던 상점과 대장간이었던 건물도 있습니다. 그 옛날 고바야시 상점에 생필품을 사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출입했을까요? 말의 편자를 바꿔주던 장제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많은 일본인이 화호리에 출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호리는 벽골제로를 사이에 두고 이어집니다. 벽골제로를 지나면 인상 고등학교가 있는데, 이곳에 일본인이 다녔던 심상 소학교와 신사 터가 있습니다. 소학교와 신사가 있던 자리로 가는 길에 소나무가 즐비한데요, 여기서 총살이 자행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학교 뒤편에 문구점이 있고,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소화 여관이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화 여관 낡은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새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여관이 있었던 자리만 확인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건물로 향했습니다.

동척이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유는 일본인 이민정책을 실시하기 위함이기도 했는데요. 신태인 화호리는 초기 이주지로 선정되어 합방 초기(1913년) 25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하여 정착했습니다. 당시 동척 사무실이었던 건물 역시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화호리를 둘러보며 이곳이 잘 보존되어 체험과 체류가 가능한 역사·문화 공간으로 조성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군산항이 호남의 쌀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물류의 거점이었다면, 화호리는 실제 일본의 수탈이 있었던 생생한 현장이었습니다. 

 

▶화호리 주변 가볼만한 곳! 신태인 아카키 도정공장과 죽산면 아리랑 문학마을

신태인은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며 새로운 교통의 중심지가 된 곳으로, 태인과 구별하기 위해 지명에 新(신)을 붙였습니다. 이곳에 아카키라는 일본인이 이주해 정미사업에 뛰어들었는데요. 신태인역 가까운 곳에 3개의 도정공장이 있었는데, 그중 아카키가 소유한 1공장이 남아 있습니다. 외부 모습을 보면 근대역사관이 들어선 구마모토 창고보다 예전 모습을 더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정읍시 생활문화센터로 이용되고 있고, 사택과 창고가 있던 부지에는 커피 스토리지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카페 안에 일제 식민지 역사를 증언하는 게시물이 있는데요. 공간이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호리와 가까운 죽산에 가면 아리랑 문학마을이 있습니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조정래 소설 <아리랑>의 배경이었던 김제 만경의 마을 모습을 재현하고, 근대 수탈기관이었던 면사무소, 주재소, 우체국, 정미소 등을 복원해 놓았는데요. <아리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민초들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담은 소설의 무대를 방문해 체험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홍보전시관에 들어가 전시해설을 듣고, 만주 하얼빈역을 60% 축소·재현한 전시관에도 가보면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화호리에서 보물찾기하듯 흩어지고 희미해진 과거의 흔적을 찾아다녔다면, 이곳은 테마별로 공간을 나눠 전시하고 있어서 얼룩지고 상처 난 역사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는 곳으로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