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을 말아먹은 이황과 율곡이이

개혁 파탄 기득권 지키려 온힘 써

태어나 읽은 책 중에서 세 번째 슬픈 책입니다.

두 번째 슬픈 책이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것이고, 가장 슬픈 책이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인데 다 연결된다는 것이 더 절망적이죠.

먼저 <靜庵조광조>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에게 중종이 힘을 실어준 이유가 세조의 계유정란부터 누적된 훈구의 세상에서 신하들 사이 세력 균형을 이루어 왕권을 강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론을 모두 빨아들여 왕권마저 위협받는다고 느끼게 되자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씌우고 죽였고, 이를 기묘사화라고 불립니다.

조선의 명정승 <이준경>은 분명 훈구의 자손입니다.

성종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그의 조부가 사약을 들고 가게 되었다고 그가 6세 때 조부와 부친의 4형제가 죽고, 집안이 풍비박산난 것을 갑자사화라 부릅니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지만요.

16세 때 <조광조>의 제자가 되는데 아직 과거에 급제 않은 3년 후 기묘사화를 겪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훈구인데 사림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리학이 당시 과거에서 주된 출제 문제가 되나, 성리학의 난해함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당시 남송 <주희>의 주자학만을 깊게 판 <이황>이 이를 솜씨있게 정리하고, 명종 13년에 문과에 급제한 <기대승>과 8년 동안 성리학에 대하여 理氣論辯 또는 四端七情 논쟁을 벌이며 일시에 전국의 사림들에게 큰 명예를 얻는데 그들 둘은 모두 스타가 됩니다.

한편 <이준경>은 또한 조선 최고의 청백리 중 한 명이었고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자산이자 毒이 됩니다.

명종 때 문제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나서 20년을 이어온, 당시 영의정이던 <윤원형>의 세상을 끝장냅니다.

명종은 재위 14년 때에 유명해진 참에 한 번 命召(임금이 신하를 불러들임)하였으나 사양했던 <퇴계이황>을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핀치에 몰린 20년째에 다시 불러 올립니다.

<이준경>의 대항마로 선택한 것이죠.

올라오는 동안에 계속 내리는 직위를 올리는 파격을 보이고 <이황>은 사뭇 벅찬 감정으로 상경하나 덜컥 명종이 죽습니다.

이미 세자가 죽었고 자식이 없던 명종이 재위 18년에 병이 중한 적이 있어, <이준경>이 중종의 후손 가운데 후궁 소생으로 私家에서 자란 후일의 선조가 되는 하성군을 세자로 정하고, 명종이 죽자 선조가 즉위합니다.

이때 공훈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선조 즉위에 가장 큰 공훈을 가진 <이준경>이 이미 고갈된 나라 살림 형편과 피폐해진 민생을 고려하여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공훈을 없던 것으로 하자고 결정합니다.

아시다시피 세조의 계유정란 부터 공훈을 남발하여 국고가 말랐습니다.

이후 거짓말처럼 거의 모든 대신들이 훈구 집안의 대명사이고 죽은 <윤원형> 다음으로 부패했던, 죽은 명종의 왕비이고 수렴첨정을 하던 대비 <인순왕후 심씨>의 편에 붙습니다.

명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낙향해야 했던 <이황>을 16세 선조의 이름으로 인순왕후가 다시 불러올립니다.

다시 조선초의 건강함을 찾을 수 있는 개혁을 부르짖는 <이준경>, <김개> 같은 신하들의 대척점에서 이황과 그 무리들(<이황>, <기대승>, <율곡이이>, <송강정철>)이 결사 반대를 외쳤으며 훈구는 목숨을 부지하고 사림들은 민생을 위한 구폐책(救弊策) 등을 강력히 반대합니다.

사실 훈구나 사림이나 유학자들의 성격이 모두 중앙에 있느냐 향촌에 있느냐의 차이일 뿐, 당시엔 기득권층이었을 뿐이었으니 최대 관심의 자신들의 권력과 이득이었을 뿐이고 외려 <이준경>이나 <남명조식> 등이 이단아였겠죠.

해서 <이황>은 8개월 동안 조정에 머물며 모든 개혁을 파탄내고 기득권 보호에 온 힘을 다하고 사림의 종장으로 우뚝서고서는, <율곡이이>에게 그 지위를 넘겨줍니다.

그리고 선조 3년에 <이준경>은 물러나고 <남명조식>과 같은 1572년에 사망합니다.

이후 정권은 정승도 아닌 小人 <율곡이이>의 손에 들어갑니다.

결국 조선 말까지 영원히 개혁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불과 2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현대 조선 사학자들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재상으로 <이준경>을 꼽습니다만 저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송나라 때의 <왕안석>이 조선에 다시 태어났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왕안석>의 신법이 <사마광>, <소동파> 등의 반대로 좌절했는데요.

우리는 <사마광>의 역할을 <이황>이, <동파소식>의 역할을 <율곡이이>가 한 것이죠.

조선을 말아먹은 원흉들이 화폐의 모델을 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일까요!! 그것도 어미까지 셋이나.

다행인 것은, 예전에 <이황>에 대해 나라에서 몇 번이나 불러 올린 스승이라고 추켜올렸던 얘기들이 요즘은 잘 안 들립니다.

<기대승>은 말씀드린 대로 사사건건 개혁을 반대하고 개혁을 좌초시켰으나 그들끼리의 붕당정치에 패해 쫒겨나 건강 문제로 일찍 죽었고, 살아있던 <율곡이이>가 파당을 만들어 직접 領首 노릇을 하며 대차게 조선을 말아먹는 기초를 깝니다.

그게 다행히 요즘에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 슬픈 것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11년 이전까지는 저 역시도 <이준경>의 이름 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서인의 후손들이 그분의 이름을 철저히 봉인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위대한 그분에 대해서 풀어드려야죠.

PS: 중국의 <습근평>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깊이 감명받으며 무려 열 번을 읽었답니다.

곧 중국을 대차게 말아먹을 겁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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