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수필가
 4월 7일은 제53회 신문의 날이다.

하루를 쉬면서 조용히 어제를 뒤돌아 보며 신문이 공공적 역능(役能)에 소홀함이 없었는가를 자성(自省)하면서 한편으로는 세계사적 진운(進運)에 자신을 투영(投影)하면서 발을 맞추는 ‘전진에의 모색’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번의 신문주간 표어를 ‘신문을 내 곁에 세상을 내 품에’로 내건 것도 그러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 알다시피 신문의 날은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일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 이전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있었지만 역시 신문다운 체제를 갖춘 것은 독립신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지금의 그것이 어지럽도록 변화를 가속시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개화기의 한성순보 등 근대신문의 출현과 함께 일제침략의 수난, 광복과 한국동란, 50년대의 자유당 독재와 맞선 투쟁시대 4.19후의 자유언론시대, 5.16후의 신문정치, 6070년대의 공화당 정권, 70년대의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때 우리 신문은 개화사상 독립사상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 제일의적 사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저항의 성격을 띠었었다.

해방 후 혼란기에는 질서를 잡아가는데 향도적 역할을 해야 했고 6.25동란 때에는 공산주의와 싸워 이기도록 앞장서야 했으며 지금은 안정적 바탕 위에 국기를 반석 위에 올려 놓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 시대적 요청일 것이다.

독자에 봉사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편파된 보도나 논평에 접하는 일이 없도록 국민이 알고 싶어하고 또 알아야 할 사실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으로 진실을 알려주고 논평에 있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논평의 입장에 접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신문인 들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강력한 존재인 정부(한동안 노무현정권 당시 중앙부처 출입기자실 대 못질)나 여당의 의향에만 영합하는 보도 논평 또 독점화한 신문방송의 위치를 기화로 무책임한 일방적 보도논평 등에 더 비중을 두는 일 그리고 영리성을 추구하는 나머지 공공성과는 거리가 먼 오락본위로 안이하게 신문을 제작하는 일 등이 없었는가?

독자에게 봉사하려는 매스미디어 중에는 우리의 방송매체와 같이 독점상태에서 오는 폐단도 없지 않고 신문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감이 투철하면서도 방대한 자본에 밀려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도 문제라 하겠다.

신문을 보는 일부 독자층의 양식은 어떤가. 마치 활자화가 안되면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말로 사실 은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있는 사실이 신문에 나지 않기 때문에 신문은 결국 불신 받는 입장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유언비어가 나돌게 된다는 것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신문인도 사회의 한 구성원들인 이상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은 특별한 안보여건 밑에서의 신문은 국가이익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가치판단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신문이 제대로 독자에게 봉사하게 하자면 신문인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독자나 국민의 입장에서도 신문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풍토와 양식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신문주간을 맞아 신문인은 독립신문의 창간 이념 그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고 독자의 여망에 부응하겠다는 신문윤리강령에 다 같이 충실할 것을 다짐하고 신문인과 경영자 애독자 그리고 정부도 언론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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