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보훈의 달이고 6일은 현충일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애국열사와 국군장병과 경찰관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고 그분들의 애국정신을 마음깊이 새겨보는 뜻 깊은 달이다.

국제사회속에서 시대와 환경은 변해도 한국의 지정학적 여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역사의 사건을 되새겨 보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과 다짐의 기회가 되여야 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을 빼앗기는 현실을 보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병투쟁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우리 익산에서도 1906년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 창의를 준비하던 면암 최익현의 지도를 받은 오하 이규홍은 박이환 문형모등 수십명의 투사를 모집하여 순창에 주둔하고 있는 최익현 의병부대와 합세하기위해 임실갈담에 갔으나 이미 관군에 의해 이미 포위되어 공격을 받아 면암과 참모 12명이 체포되었고 면암 최익현 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단식으로 항거하던 중 순국한다.

▲의병준비

1907년 익산의병은 재정비 하여 이규홍을 의병장으로 부장 박이환 참모장 문형모를 주축으로 7개지대 257명의 의병을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투쟁에 열기를 높여갔다.

이때 면암의 부장격인 임병찬은 이규홍에게 의병의 지휘 지침 6개항을 보냈다.

첫째가 청렴 검약 둘째 분재는 의를 벗어나지 말것 셋째 병졸은 맡은 직분을 저버리지 말것 넷째 사병은 기욕과 주색을 끊게 할 것 다섯째 협의를 피할 것 여섯째 사병 간에 근검절약을 지킬 것 등이다.

▲의병출정과 고천제

1907년 11월 6일 익산 팔봉 석암동 관동 뒷산에서 성대한 의병 출정식을 통해 구국에 열정을 다짐한 후 비봉면 화월리 불당골에 무기 제작소를 만들고 진안 주천 대불리 화양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드림으로 구국의 성전에 하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1차전투

1907.11.17 화산면 가금재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여 왜군 29명을 사살하고 아군 21명이 전사했다.

▲2차전투

1907.12.5 진안 주천면 대불리에서 이 지역의 자원 의병과 무주, 임실과 진안의 의병이 합세하여 1,000여명으로 증원된 의병은 일본 정규군과 격전의 한판을 치른다.

이 전투에서 왜병44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성공적인 전투를 했다.

▲3차전투

1908.1.4 충남 금산 남이면 600고지에서는 일본정규군 기마부대와 피비린내 나는 결사의 전쟁을 했다.

혹한의 추위 속에 굶주림과 장비의 열악함은 의병에 전의를 최악의 사항으로 몰고 갔다.

참으로 악전고투였다.

이 전투에서 왜병 56명을 사살했고 의병57명이 전사했다.

지금까지 세 번의 전투에서 129명의 왜병을 사살했고 의병 85명이 전사했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의병의 해산

여기에서 의병의 전의는 완전히 상실했고 의병장과 함께한 참모들은 격전지에서 후퇴하여 대전시 동구 식장산 중턱 장군바위 아래 모여 향후 전략을 상의한다.

이때가 1908년 4월20일이다.

의병의 해산을 결의한다.

구국의 일념으로 시작한 의병이 패전의 비참한 현실 앞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심정을 시한수를 지어 이규홍 의병장의 마음을 표현했다.

  投劍空山座 淚零坫 戰衣 蜀鵑解知意 嚌罷不如歸칼을 던지고 빈산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눈물이 전의를 적신다.

저 두견만이 나의 뜻을 알아서, 불여귀의 비정을 함께 울어주네  의병 창의 후 5개월의 피나는 전쟁을 끝내고 의병은 지하 활동으로 들어간다.

일제는 4,0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이규홍 의병장을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은신처를 옮겨 가며 피신하던 중 대덕군 산내면 사한리에 있는 친지 송창재씨 댁에 은신하다 일경의 추적을 받아 오도산(해발 337M) 에서 총격을 받고 1918년 중국으로 망명 상해에서 이동령, 이시영,이광수,안창호,신익희씨와 만나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떠나는 김규식에게 1,300원을 출연했고 귀국도중 간도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 만주 군관학교 독립군 양성비로 3,000원을 출연했다.

귀국 후 의병조직과 함께 항일의병활동을 하다가 1924년 2월8일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6월6일 향년 48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전북의병을 대표하는 익산의병은 시대의 무관심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에는 전북의병을 토벌하기위해  일본 정규군 10,000명을 투입했다는 내용은 있으나 전북의병의주체인 익산의병의 역사적 기록은 없다.

익산 의병의 특징은 순수한 백성들에 의해 조직되고 모든 군비도 이규홍 의병장의 부친 이기영 옹이 사재를 방매하여 지원했다는 것이 타지역과 차별화 된 것이고 한국 의병사상 5개월간의 투쟁은 유래가 없는 것이다.

102년 동안 묻혀있던 익산의병을 재조명 하여 시민에게 알려 나라사랑의 표본으로 삼고 의병기념사업(기념공원, 기념관, 영정관, 85순국의병 묘, 생가복원, 견적지 표석)을 이룩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의병정신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 보훈의 달 6월에 오늘을사는 도민이 이룩해야 할 과업이다.

   / 익산새노인운동본부 상임대표 이 용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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