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화/전주기전대학 겸임교수
크리스찬 디오르(Christian Dior)는 1905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그랑빌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파리의 미술관과 박물관 등에서 윤택하게 보냈으며 부모님의 권유로 파리정치학 학교를 마치게 되지만 이후 전공과는 무관하게 소규모 아트 갤러리를 오픈하게 되면서 1928년 큐레이터로 예술계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 일을 그만두게 되고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여성 모자 메이커인 아그네스에서 모자 스케치를 하였으며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 일러스트」 등에 수없이 많은 그의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피케, 달리, 콕토, 베라르 등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회화에 대한 안목을 폭넓게 가질 수 있었고 매혹적이면서 균형 잡힌 감각 등을 갖추면서 예술가로써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게 되면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이후 파리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돌아갈 자리는 없었다.

이때, 디오르는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던 프랑스의 가장 큰 직물 회사인 마르셀 부사크의 운영을 제의 받게 되면서 그의 패션신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46년 디오르 꾸뛰르 하우스(couture house)를 열게 되었고 첫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된다. 여성이라면 한번쯤은 누구나가 Dior의 의류를 열망한다.

그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여심을 사로잡았던 이유를 이야기 하자면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0년대 중반으로 다시금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전쟁의 상처로 모든 것이 통제되어 단순화, 축소화되었기 때문에 패션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패션은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확대됨에 따라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남성화된 제복의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이 등장하였고, 이는 각진 어깨, 짧은 스커트로 된 테일러드 수트 스타일의 실용적인 기능복으로 전후에도 얼마간 유행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자 밀리터리 룩은 여성스럽게 허리가 가늘어지고 넓은 어깨와 포켓을 강조한 재킷으로 대담하고 거대한 스타일의 볼드 룩(bold look)으로 변하였다.

그러던 중 1947년 디오르는 뉴룩(new look)을 발표하면서 패션의 전환점에 선 이시기에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디오르는 옷감을 넉넉하게 사용하여 만든 고급스럽고 화려한 옷을 새로운 곡선미를 강조한 여체에 입히게 되었고 그의 대담하고 과장된 아름다운 실루엣은 기존의 딱딱하고 남성스러운 제복 스타일의 옷이 줄 수 없었던 여성스러움을 찾아주기에 충분했으므로 여성들은 디오르의 뉴룩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퍼스 바자」의 영향력 있는 편집자 카멜 스노(Camel Snow)는 “크리스티앙씨, 당신의 드레스에는 뉴룩이 있습니다. ”라고 경탄해 패션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뉴룩의 탄생 배경이 되면서 그의 디자인에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뉴 룩(New Look)’이라고 정의된 패션은 몇 달 만에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는 곧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패션을 지향하는 미국의 자본주의 시장에 뉴욕지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물론 미국 내 여성 해방 운동가들에게 디오르의 과장된 뉴룩은 사치스러움의 조장으로 많은 규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디오로는 그것에 굽히지 않고 자신만의 라인을 만들어갔다.

그 결과 그해 뉴욕지사에서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기록을 이루게 된다. “사람들은 사치에 굶주려 있었고, 그는 이를 충분히 채워주었다.

” 「하퍼스 바자」최전성기때 편집장 다이애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가 한 말이다.

뉴룩은 여성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회복시킨 스타일로서 가는 허리, 둥근 어깨, 풍성하게 퍼지는 롱 플레어스커트로 이루어진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여성들은 전쟁 중 내핍생활의 고통과 획일적인 유니폼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상태라서 극도의 기쁨과 흥분으로 뉴룩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뉴룩의 새로운 시도 이후 디오르의 스타일 역사는 연속적으로 수많은 라인(H, A, Y, F...)을 발표하면서 1950년대 초반을 주도하였고 1956년 막을 내렸지만, 그의 영향력은 1950년대 초반을 훨씬 지나 브리짓 바르도의 1958년 핑크색 웨딩드레스에까지도 계속되었다.

디오르의 호화롭고 우아하며 조형화된 구조의 디자인들은 후에 수십 명의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디오르 하우스의 존속을 보장해주었다. 1957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디오르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디오르가 죽고 난 후 크리스찬 디오르 하우스는 입생 로랑, 마크 보앙, 지안 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등 유능한 여러 명의 수석 디자이너에 의해 그 명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 마음속에 영원한 향수로 기억되고 있다.

/홍정화<전주기전대학 의상코디네이션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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