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장
전라감영 선화당 위치를 찾음으로서 감영복원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구술과 문헌을 비롯하여 여러 기초 조사를 통하여 국가기록원에서 선화당 위치가 그려진 2장의 도면을 찾았을 때 전율을 느낄만큼 감동적이었다.

잃어버린 전라감영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국가의 중요문서를 영구보존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음으로, 우리가 찾지 못했다면 후대에 언제가는 찾을 수 있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가도 없어지지는 않는 자료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시간이 가면 찾고 싶어도, 많은 예산을 투입해도 찾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있는 마을 이야기들이다. 각 마을의 역사, 그리고 이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이를 기억하는 마을의 원로들이 세상을 등지면 영원히 묻혀 버리는 것들이다.

80세를 넘어가는 분들은 전통의 시대와 산업화 이후의 시대를 같이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분들은 우리의 전통이 무엇이고, 변화된 것이 어떤 것이며, 또 그 마을에 담긴 알토란같은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

전주에서 남원가는 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객사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상관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곳으로 좌익이 강성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오씨집성촌으로 양반세가 강했던 곳인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만석꾼 집안이 좌익으로 자리하여 몰락하였다.

오씨의 아들 하나는 좁은목 근처에서 죽임을 당하고 딸은 원불교에 귀의하였다. 이 마을 뒤편에 있는 원불교 교당은 오씨 집안에서 땅을 기증한 것이다. 전주가 좌익이 강했다는 막연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마을조사를 통해서이다.

또 용산다리에서 삼례 가는 방향으로 천을 따라 가다보면 춘향전에 나오는 주엽정이(평리) 마을이 있다.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서울을 왕래할 때 건넜던 돌다리 터와 그 부재가 남아 있다. 옆 동네인 신흥마을에는 서울을 오갔던 옛길이 남아있다.

이도령만이 아니라 수많은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향해갔던 길이다. 근래 채록한 이야기 하나 더 소개하면, 물꼬싸움이 논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지를 뜰 때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종이도 물이 없으면 뜰 수 없음으로 가뭄이 들면 서로 좋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한지 스토리텔링 차원에서도 채록되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마을에 담겨 있는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생명을 다해 가고 있다. 이를 기억하는 마을 원로들이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이분들이 기억하는 마을의 이야기들을 채록해 두는 것이 시급하다.

건물을 짓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도 긴요한 일이다. 또 이런 마을 조사가 많은 예산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적은 예산으로 미래의 큰 자산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이다. 전주의 경우 시사를 발간한지 10년이 넘었다.

따라서 새롭게 전주시사를 편찬해야 하는 시점이지만, 이를 뒤로 미루고 향후 2, 3년에 걸쳐 각 마을을 조사하고, 동별 이야기를 총서 시리즈로 발간해 이를 집대성하면 큰 문화자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동별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총서를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다. 마을 이야기 채록은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며, 나아가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 길이다. 

더 늦기전에 마을 조사를 시행하는 것이 전북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요, 전통문화의 수도 전주를 더 탄탄하게 구축하는 방안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조사방안은 대략적인 것이 아니라 마을 하나하나를 다 돌아다니면서 이루어지는 전수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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