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재 언론인

기원전 260년 조(趙)나라는 울음바다로 변했다.

거의 모든 집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진(秦)나라와의 싸움에서 참패한 결과였다.

장평(長平) 전투에서 45만 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전사자는 5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40만 명은 항복했지만 학살당했다.

진나라의 장수는 백기(白起)였다.

살인마라기보다는 전략가였다.

그는 조나라를 두려워했다.

조나라는 '턱 밑의 칼'같은 존재였다.

더욱이 국력도 만만치 않았다.

조나라는 불과 30년 전 혁신을 통해 전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오랑캐의 기병(騎兵) 제도를 도입,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했다.

조나라 기병들은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했다.

조나라 무령왕은 남다른 혁신역량을 과시했다.

오랑캐 기병 제도를 도입하면서 호복(胡服)도 채택했다.

말 그대로 '오랑캐 옷차림'이다.

소매도 좁고, 길이도 짧아 걸리적거리는 게 없었다.

전투복으로서는 최고의 기능을 발휘했다.

무령왕은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의 아들들이 나라를 다스렸다.

더욱이 재상 평원군(平原君)은 맹상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평원군은 형 혜문왕을 성실히 보필했다.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진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백기는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마침내 야수(野獸)의 결정을 내렸다.

포로 가운데 240여 명의 소년병만 살려줬다.

나머지는 모두 골짜기로 몰아넣은 후 생매장했다.

소년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백기는 그런 심리적 패닉까지 계산에 넣었다.

후세는 '춘추전국' 시대라고 통칭한다.

하지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시대정신'을 달리했다.

전쟁의 목표도 판이했다.

춘추시대는 국제질서의 유지를 목표로 삼았다.

전국시대는 다른 나라의 병탄(倂呑)을 궁극적인 목표로 내세웠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축구 또는 야구 경기나 비슷했다.

승패가 결정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도주하는 적을 쫓지도 않았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오십보만 도망가도 목숨을 건질 수 있는데 백보나 후퇴하니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전국시대 때의 전쟁은 총력전이었다.

가용자원을 최대한 동원했다.

그래야 적(敵)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살인을 전투의 목표로 제시했다.

적의 수급(首級)을 포상 기준으로 삼았다.

병법도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승리는 병력과 병법의 함수였다.

백기는 학살을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결단이라고 합리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백기는 나중에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자살했다.

그는 목숨을 끊기 앞서 "장평에서 하룻밤 사이에 40만 명이나 죽여 하늘에 큰 죄를 지었다"고 한탄했다.

현대는 경제전쟁의 시대다.

정부와 기업은 물론 가계까지 힘을 합쳐 총력전을 기울인다.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불안감은 깊어지고 있다.

내수에다 수출까지 부진하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제 전쟁의 승패는 생산요소 투입량과 총요소 생산성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요소 투입량은 정해져 있다.

단기간에 크게 늘리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연구개발(R&D) 및 혁신 등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R&D 투자규모로는 한국은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하지만 절대 규모로는 강대국보다 크게 떨어진다.

지난 2010년 우리의 R&D 투자는 528억 달러로 세계 5위를 기록했다.

미국은 4087억 달러로 우리의 8배, 중국은 1396억 달러로 우리의 3배에 달한다.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과 똑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면 백전백패다.

다른 나라의 R&D 활동을 분석한 후 선택적 집중을 통해 니치마켓을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줄곧 '창조 경제를 외치고 있다.

아직도 실체는 불분명하다.

언어는 달콤하다.

실속은 없다.

추상적인 단어는 더욱 그렇다.

목표가 불명확하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은 기대키 어렵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헬리콥터를 타고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외쳤다.

그래서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근혜 정부에게는 '헬리콥터 박(朴)'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것 같다.

과학기술계 주변에서 "돈은 쓰는데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정책 목표는 뚜렷해야 한다.

하지만 '창조경제'라는 유령만 쫓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무심히 봄날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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