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구 칼럼니스트
/이춘구 칼럼니스트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지속가능성은 인간이 속한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달려 있다.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존재를 가리킨다. 우리 역사를 살피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노동공동체인 두레와 경제공동체인 계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따라 두레나 계의 모습이 바뀌는 데 고려 말 이후에는 향촌사회의 공동체로서 향약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향약은 송나라 여씨 향약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실제로는 두레와 계 등의 형태로 그 기능이 이미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향약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의 미풍약속을 지키며 계승되고 있다. 향약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하는 방책으로, 재지사족은 향촌민을 지배하는 목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우리 고향 전북에서는 성종 6년(1475) 정극인 선생 등이 주축이 돼 정읍 태인에서 고현향약을 처음으로 실시했다. 고현향약은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남원 금지면 입암리 일대에서 시행되는 입암향약에 관한 사적이 관심을 끌고 있다. 입암향약의 성립과 계승, 발전방안 모색 등이 이번 논의의 초점이다. 

중앙대학교 송화섭 교수와 박경하 교수 두 분이 사전에 답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입암향약은 정조 19년(1795)에 결성돼 지금까지 227년 동안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두 분 교수는 입암향약이 사신(축제)공동체, 두레 공동노동의 노동공동체, 서로 일상생활에서 돕고 사는 생활공동체의 세 기능을 다 가지고 있으며, 향약의 정신 뿐 아니라 경제생활공동체로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데 대해 놀랍다고 밝혔다.    
조선시대에는 향약의 공동전답이 상당해 약원들이 소작을 하고 세를 연말에 납부했는데 그 액수까지 기재된 문서가 나왔다. 촌계로서 노동공동체의 경제생활을 계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향약이 유지되다가, 해방 후 공동전답은 소작하던 사람들에게 유상으로 분배됐다. 해방 후 향약의 명칭은 '이동협동조합'으로 유지됐다가 1971년 '새마을회'로 개칭하고 지금도 이 명칭으로 사용한다. 

현재는 15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전 가구가 가입돼있고, 회비도 걷지 않는다. 향약의 유동자산은 2억5천여만 원이며, 소유 부동산을 바탕으로 사제 맥주공장, 카페, 공동 정미소 등으로 임대를 하고 있다. 또 공동전답을 임대해 1년에 1,500만의 수입을 올려서 한 가구에 3만원씩 배당하기로 결정했다. 금액은 얼마 안 되나 다른 부분의 복지를 자율적으로 자급자족하고 있다. 

향약 산하에 노인회, 청년회, 장학회, 작목반 등이 있다. 장학회는 백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리고 작목반에서는 포도 등 작물을 공동으로 생산한다. 입암마을 향약은 복지국가 시대에 정부의 도움 없이도 살아가는 독립구이다. 박경하 교수는 기본소득 배당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새마을회를 주민자치회로 바꾸면 자율적 자치복지의 이상적인 주민자치회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필자도 박경하 교수의 전망에 동의를 한다. 다만 입암향약 약원들의 연령구조, 경제활동, 지속가능성 등을 분석해 마을자치연금으로의 발전가능성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을자치연금이 도입된다면 입암마을은 소멸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분 교수의 노력에 의해 남원문화원과 남원시는 8월쯤 향촌사회사연구소 주관으로 학술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토론회에서는 조선후기 향약의 성격을 비롯해 입암동계 운영과 변화과정, 동제의 문화적 성격, 해방이후 입암마을의 마을공동자산 운영 방식 등을 주제로 전문가와 연구자들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동네 최고의 원로인 배용춘 회장과 동네 안내를 맡아 주신 방주현 전 교장선생, 그리고 무엇보다 고향의 발전을 위해 사비를 들여가면서 봉사하는 김대근 전 전북도청 국장의 노력이 있어서 입암향약이 오늘날에도 유지된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 봉사자들이 고향에 대한 애향심과 선조들의 뜻을 이어 가기에 공동체가 계승돼 간다. 옛 전통은 낡은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 지혜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이춘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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