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야사 해공신익희











정치야사 해공신익희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 구호만큼 유권자의 가슴을 치고 국민적 공감을 불러이르킨 선거구호는 없다.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되는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민주당이 내건 이 선거구호는 당시의 민심을 집약한 적절한 내용으로 어린이들까지
동요처럼 부르고 다녔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번에는 2번, 대통령에 신익희! 일등은 1번, 부통령은 장면! 못살겠다 갈아보자! 못살겠다 갈아보자!'
당시 고교 3년생이던 필자는 지금도 그 내용을 외고 있다.
'사사오입'이란 해괴한 수학적 이론을 도입해서 일단 부결로 선포된 개헌안을 번복 통과를 선언하고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년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독재와 전횡에 분노가 끓어 오르던 국민들은 민주당의 신익희 장면 두 후보에게 기대를 걸었고 마침내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황한 자유당이 이에 맞서 내놓은 구호라는 것이 '가러봤자 더 못산다'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등이었으니
5.15선거의 시작은 야당이 기선을 잡았고 민주당 부움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4월 11일 오후 5시, 민주당의 정 부통령후보인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와 운석(雲石) 장면(張勉)은 종로 수송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첫 번째
연설회를 갖고 포문을 열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운동장은 발붙일 틈도 없이 꽉 들어찼고 나무 위나 담장 위 근처 집들의 지붕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가 있었다.
해공은 힘이 불끈 솟았다.
"전쟁중에 일선에서 죽어가는 사병이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는 대신에 '빽'이라고 외치고 죽어갔다는 애기를 여러분 아시죠! 왜 민중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만드느냐 말입니다. 정치를 왜 그렇게해요? 사바사바라는 말은 왜 생겨났습니까? 이 정치하에서는 사바사바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하다못해
호적초본 한 장 뗄려도 양담배 한 갑 들이밀구 사바사바하는 세상이에요! 이러니 선량하고 정직한 국민이 어찌 살아가느냐 말이에요! 못살겠다는 애기는
우리 민주당의 구호가 아니요 전국민의 구호요, 갈아보자는 생각 또한 전국민의 생각이 되는 이유가 거기있는 것이에요!"
시중에 유행하는 말을 인용하며 민주당의 구호를 국민의 구호라고 외치는 해공의 열변에 청중들은 무더위를 씻는 패연한 소나기 한마당처럼 시원해 했고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열띤 환호를 보냈다.
해공의 인기가 수직상승하고 천년아성 이승만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신익희대통령시대'는 꿈이 아니었다.
전황이 심상치 안차 자유당은 신익희 개인의 신상을 둘러싼 마타도어를 시작했다.
여당계 신문에 '장남은 중공에서 활약'이란 제하 '신익희의 장남은 지금 중공에 들어가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운운하며 대서특필했다 .

해공의 장남 신하균(申河均)이 해명에 나서야했다.
"장남인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나를 중공에 가 있다니요!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중상과 모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남 거제군 장승포경찰서 사찰주임은 관내 유지를 모아놓고 자신이 눈으로 본듯이 말했다.
"신익희가 인기가 있닥 카드만도 이 사람 대통령 되어보소 정말 큰 일잉기라. 서울 명월관가먼 신익희 첩이 한타스나 있능기라!"
각료들도 나섰다.
4월 26일 이리여고 강당에서 전북 각급 학교 교직원을 모아놓고 문교장관 이선근(李宣根)이 연설을 하고있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도대체 무얼 못살겠다는거야. 그건 공산당이나 하는 소리예요. 여러분, 현혹되어서는 안된단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경무대에서 들으라는 듯 높아갔다.
"못살겠다고 외치는 놈이 누구야? 그런 놈들은 일본이나 삼팔 이북으로 보따리를 싸서 쫓아 내야 돼! 감히 제깐 놈들이 우리 국부 이대통령
각하를 욕하고 이기붕의장을 비난해?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장관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여당선거운동에 동원되었다.
4월 27일 김제경찰서에 근무하던 김일갑(金日甲)경위가 사표를 내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김경위는 "경찰 상부에서 지령을 내리고 선거운동을 하고있다. 농민은 마음속으로 야당을 지지하고 있는데 경찰이 선량한 농민의 뜻을 짓밟으려
하고 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고 양심선언의 배경을 밝혔다.
사실 해공이 선거에서 관권탄압을 받은 것은 이번 대통령선거가 처음은 아니었다.
5.20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자신의 탯자리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혹심한 관권탄압을 체험했다.
자유당은 이곳에 서른 다섯살난 최인규(崔仁圭)를 공천해서 내놓고는 철저한 관권개입을 통해 야당의 영수를 공략했다.
최인규는 서대문의 이기붕과 박마리아에게 선거전황을 일일보고 했고 경찰은 연설장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차단 봉쇄했다.
해공이 예정된 연설회장에 도착했지만 청중은 단 한명도 없었다.
"마이크를 이리주게"
 보이지않는 마을 사람들의 귀가 어디선지 이 연설을 듣고 있겠지 생각하며 창공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나 신익희 올시다. 여러 유권자들게 인사두 할겸해서 찾아왔는데 뵐 수가 없어 이렇게 목소리만 전하겠습니다."
시골이라 이쪽 연설장에서 저쪽 연설장으로 가려면 차가 못들어가는 곳이 많았다.
논두렁길을 걷고 산고개를 넘었다.
그럴때면 밭고랑이나 산 중턱 나무밑에서 숨었던 사람들이 달려나와 해공을 붙들고 와락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선거일을 불과 몇일 남겨놓고 언주면에 갔을 때였다.
강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에도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면을 둘러 보아도 푸르른 5월의 산천만 눈에 가득했다.
장부인 해공의 눈에도 눈물이 돌았다. 허공을 향해 강연을 시작했다.
"아까 돌마면에 들렸는데 꼭 다섯 분이 오셨습니다. 마침 선거 시찰차 나온 유엔 호주대표 한분이 웬일이냐고 놀라서 뭇습디다. 그 호주양반은
사진을 찍고 갔는데, 여기 안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돌마면에서는 다섯 분의 청중이 모였으니 다행아닙니까"
그때는 면단위 합동강연회가 있었다. 첫 합동유세는 오포면이었다.
최인규는 합동강연회에 나오지도 않았다. 작은 규모의 면인데도 천여명이 모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로는 사복경찰이 강연장으로 가는 길목마다 지켜서서 눈을 부라리며 막고 방해를 하는 바람에 모이는 사람들이 열명도
되지않았고 그것도 노인들뿐이었다.
"여러 유권자님들! 안나오신거 잘 하셨습니다. 나오지 못하게 탄압하는데 굳이 나오실 필요없습니다. 공연히 잘못나왔다가 피해보시면 안되는거예요.
하기야 수많은 유권자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저의 포부를 연설하고, 여러분의 박수를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어디 그렇습니까?
민주주의가 우리 고향에서 짓밟히고 있습니다그려!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저는 통탄하여 마지않는 바올시다."
해공은 목이 메었다.
"여러분! 낙심은 금물이에요. 이 정도의 탄압을 받았다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호랑이한테 물려가두 정신만
바짝 차리구 있으면 죽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백발을 바람에 날리며 외쳤다.
"합동정견발표에는 한 사람 안나와두 좋습니다. 그러나 투표! 투표가 다가오는 5월 20일이에요. 투표날만 정신을 바짝 차리세요! 그것이
이기는 길이에요."
담장 안에서 울타리 너머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촌부(村夫)촌부(村婦)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민심은 숨어있었지만 결코 죽지않았다.
자기집 강아지를 내세워도 당선이 문제없다고 호언하던 경찰서장이 사나운 개처럼 날뛰었지만 광주에서 자유당 최인규는 참패했다.
유효투표의 86프로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고 해공은 다시 국회에 들어섰다.
그 악날한 관권의 횡포와 탄압을 해공은 지금 또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열망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신익희 후보는 5월 15일의 승리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5월 3일은 한국정치사에 오래 기억될 역사적인 날이다.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모였다는 민주당의 한강백사장유세가 있던 날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제일한강교인 인도교 부근 한강 백사장에서 민주당은 대정견발표회를 갖기로 했다.
선거일을 열하루 앞둔 날이었다.
서울운동장도 장충단 공원도 빌릴 수가 없는 민주당이 어쩔수 없이 선택한 장소였다.
당시의 불편한 교통사정도 몰려드는 인파에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예정된 시간은 오후 2시였지만 오전부터 백사장을 향해 이어지는 행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백사장을 가득메운 인파, 훗날 '백만인파'라고 호칭된 이날의 인파는 30만을 확실하게 넘어서고 있었다.
인도교는 물론 강 건너 흑석동 언덕까지 덮어버린 사람의 물결은 그야말로 인산(人山) 인해(人海)였다.
해공도 운석도 그리고 유석도 탄성을 올렸다.
민주주의 승리를 확인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환호와 박수속에 마이크앞에 선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는  연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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