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 총선을 앞두고 자생 야당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12대 총선을 앞두고 자생 야당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11월30일 3차 해금을 전후에서 민추협은 민추협대로 비민추협 인사들은 이철승을 중심으로 새로운 통합 자생 야당의 구상을 수놓아갔다.


12월 11일 한일관에서 열린 민추협 전체 운영회의에서는 12대 총선과 신당
참여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토론에 나선 임광순 국제국장 등은 총선을 통한 민주화투쟁을 강력히 주장했고 마침내 진로를 의장단인 김영삼, 김상현 공동의장에서 위임한다는 결의를 얻어냈다.

12월 8일 이철승은 상도동으로 김영삼을 찾아 2자 회담을 갖고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야당을 창당’ 한다는 데 뜻을 함께 한다고 발표했다.

박정희의 5·16 후 10년이란 세월을 정치 정화법에 묶여 있던 이철승은 전두환에 의해서 또다시 정치규제를 받는 불운과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묶여 있는 동안 그는 시청 앞 백남 빌딩을 거점으로 김수한, 박실, 김병수 등의 조언과 조력을 받으며 꾸준히 조직을 다져왔다.


이철승은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 끝에 민추와 비민추를 엮는 자생 신당의 창당에 성공했으며 신당의
병풍역을 자임했다.

<동아일보>는 만평에서 이철승이 양손으로 양쪽 교각을 떠받치고 있는
그림을 그려 그가 신당 창당의 '대역(代役)‘이었음을 공증하기도 했다.

이렇게 창당을 본 신한민주당(약칭 민주당)은
1985년 1월 18일 자생 야당의 깃발을 올리고 초대 총재로 이민우 씨를 선출했다. 시간과 자금에 쫓긴 신민당은 곧바로 2·12총선에 대비한 선거체제로 들어섰고 선거대책본부장으로 김재광이 선임되었으며 이민우 총재는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뾰족한 선거무기가 없었던 신민당은 당 기관지를 통한 홍보에 진력하기로 전략을 세우고 <신민주전선>이란 제호의 당보를 발간, 임광순을 초대 주간으로 임명했다.

창간호에서 당보의 제호 왼쪽에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 그리고 오른쪽에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다.
김영삼 전 신민당총재’ 라는 양김의 어록을 실어 신민당이 그들에 의해서 주도된 정당임을 상징적으로 내세웠다.

필자는 ‘북을 울려라, 언로(言路)를 열자’라는 제하의 시 한수를 써서 신민주전선
창간호에 실었다.

 

雪花가 天地에 가득 피던 날

오랜 잠에서 깨어나

너 우리 앞에 섰다

新民主前線

 

갇혔던 者, 묶였던 사람들

비로소 일어나

언 몸 채 녹이기고 전에

凍土를 달려야 한느데

裸木에 엉기는 北風은 차고

멍든 가슴 맺힌 恨이 말문을 막는다

 

行間을 더듬어

잃어버린 活字를 줍고 있던

암울한 날들이 언제쯤이면 슬픈 전설로 남을 것인가

 

붓을 들고 바라보는

餘白이 너무 넓구나

 

狂風이 깃발을 찢고

우리 다시 갇히고 묶인다 해도

아, 어찌 참으랴

‘말좀하고 삽시다’

 

사실 그대로

본대로 들은 대로

말하고 노래 부르고

쓰고 알리고

여기 言路를 열어

북을 울리자

 

자유는 싸운 자만이 갖는 것

民主는 찾는 자만이 얻는 것

 

새로운 民主前線에 서라

民衆과 함께 民主化時代를 열자

 

2·12총선에서
67명을 당선시킨 신민당은 ‘동토에 핀 꽃’ 으로 일컬어지는 기적의 대승을 거두고 당당히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김대중은 귀국 후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자리를 정하면서 신민당과 민추협의
동교동계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사면 복권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행동의 제약을 받아야 했다.

김영삼은 이민우를 앞세워 당 운용에 한계를 느꼈고, 다음 전당대회에서 자신이 직접
총재를 맡을 생각이었으며 그 방법으로는 이총재가 자신의 손을 들어 주는 무혈 입성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총재는 홍사덕 대변인의
머리를 빌려 ‘민주화 7개항’ 이란 이민우 구상을 내놓고 독자 노선의 의욕을 보이는 등 만만치 않은 대응자세를 보였다

이민우를 진산의 아류로 보아 온 김대중은 이총재의 일련의 행동이 항상 의심스러웠고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나서는 이철승에게도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김대중은 의도적으로 신민당과 거리를 두는 언행으로 김영삼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이철승을 당기위원회에 걸어 징계하는
쪽으로 몰아갔다.

동교동쪽 차지였던 당기위원장은 원래 조순형이 맡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는 선친 유석과  소석의 관계를 들어 이를 고사했고 이 짐은 김영배에게 지워졌다. 그러나 이철승을 징계하는데는 많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었고 당사자인 소석은 양김이 ‘수렴청정’ 을 하는 굴욕을 참으며 백의종군하고 있는데도 그처럼 섭섭하게 구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행동에 크게 분개하며
반발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무렵 신민당 당기국장은 소석계인 김두석이 맡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택희의 징계 파동마져 겹쳐
충주에서 동원된 ‘행동대’ 가 인의동 신민당사를 점거하는 불상사가 터지고 마침내 유혈사태를 빚고 말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분당을 결심하게 되고 동교동과 상도동은 동일지분으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양김의 손짓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민한당의 경우처럼 신민당의 주력들은 통일민주당으로 대거 자리를 옮겨갔고
끝까지 버티던 이민우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삼양동 자택에 칩거해 버렸다.

이철승은 신도환 등과 함께 신민당의 간판을 지켰으나, 그 주변에는 김병수 등 몇몇만이
외롭게 남았을 뿐 그를 따르던 동지들은 다투어 김대중과 김영삼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4·13호헌조치로
5공의 정권 연장을 시도했던 전두환은 국민의 뜻에 굴복 6·29헌법개정
약속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였다.

사면 복권된 김대중은 대통령후보를 놓고 김영삼과 대립하다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평화 민주당을 창당하니 야권은
대통령선거를 앞에 두고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1노 3김이 겨룬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이른바 3김은 노태우
후보에게 통한의 패배를 기록했고 ‘군정종식’ 이란 국민적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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