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대곤의 감성오딧세이 - 풍뎅이가 쓸어 놓은 마당










라대곤의 감성오딧세이 - 풍뎅이가 쓸어 놓은 마당

 

풍뎅이 한 마리가 창으로 날라 들더니 등이 뒤집힌 체 날개를 펴고 방바닥에서 맴돈다. 뒷산 숲에서 멀리도 날라 왔다. 내 기억 속의 풍뎅이는 이렇게 멀리 날라 올 수가 없다, 두꺼운 등허리 껍데기 속의 날개를
펼 때는 목이 비틀려 마당을 쓸라고 할 때뿐이었는데 오늘은 목도 멀쩡한데 날개를 폈다.

내 어린 날의 놀이터는 들녘이었다. 작은 저수지 옆에 논둑 길을 따라 뛰어다니다
보면 흔하게 만나는 것이 곤충이었다. 만만한 녀석들이 내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일부러 개미집을 찾아서 오줌을 갈긴다든지 작은 꽃뱀을 잡아 껍질을
벗겨 몸을 뒤틀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즐기는 못된 아이였다.

장마가 지나고 시원한 나무그늘 속에서 더위를 식힐 때면 제일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 풍뎅이였다. 마을 뒷산에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풍뎅이는 상수리나무 상처의 진액을 빨아먹고 살았기 때문에 쉽게 잡혔다.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모두 떼어버리고 모가지를 확 돌려놓으면 날개를 펴고 죽어라 마당을 쓸었다. 그것이 고통을 참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르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풍뎅이를 알지 못하는 나는 지금도 날개를 펴고 마당을 쓸 때는 사지가 절단되고 목이 비틀렸을 때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한바퀴가 완전히 돌아가도 매달려 있는 목 줄기였다. 아마도 목이 비틀려 방향감각을 잃고
절체절명의 몸부림으로 날개가 찢어질 듯 윙윙거리면서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풍뎅아 풍뎅아 마당 쓸어라, 앞마당도 쓸고 뒷마당도
쓸고….” 죽어 가는 풍뎅이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처절하게 쓸어 놓은 마당 위에 서서 마치 내가 큰일을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했던 일이
철들어 생각해 보니 남 몰래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그 무렵 우리는 너무 따분했다. 함께 자랐던 정식이와 순녀까지 우리 셋이
길고 긴 여름방학동안 할 수 있는 놀이라는 것들이 모두 곤충학대였다. 풍뎅이 목 비트는 것은 기본이고 개울에서 잡아 낸 붕어를 산채 낚시에 매달아
볕에 태워 죽인 것말고도 달아나는 쥐새끼를 잡아 돌멩이로 짓이긴 것까지 수도 없었다.

유난히 청갈을 떨어대던 순녀도 풍뎅이의 목은 비틀었다. 제 마당을 쓸게 한다고
한꺼번에 여러 마리를 잡아오기도 했다. 풍뎅이가 쓸어놓은 동전만 한 마당을 우리는 서로 자기 것이 크다고 다툼질을 하다가 실증이 나면 입으로 불어
날려 버렸다. 죽을힘을 다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만들어 놓은 풍뎅이의 작은 마당은 아무 때나 지워버리고 다시 쓸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우습게 생각한
것이다.

날라 온 풍뎅이가 고향생각을 불러다 준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 참나무가 서 있을까?
마당싸움을 하던 뒷동산 언덕 밑에 곱게 자라던 클로버는 지금쯤 잎이 피었을까? 정식이와 순녀도 보고 싶다.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 쓸어 놓은 마당은 얼마나 클까? 지금 만나도 옛날처럼 티
없이 웃을 수가 있을까? 그때가 그립다. 새삼스럽게 생각을 해보면 지금의 내 삶이 풍뎅이의 마당 쓸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내가 아니었던가? 마당을 쓸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목이 비틀리고 다리가 잘린 채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풍뎅이와 무엇이 다를 것이 무언가?

마음이 조급해진다. 진정 내가 쓸고 싶었던 마당은 입 바람으로 불면 날아가 버리는
풍뎅이의 작은 마당이 아니었다.  크고 잘 다져진 운동장은 내 마음이었을 뿐
나는 풍뎅이처럼 목이 비틀려 작은 마당조차 쓸어 놓지를 못하고 말았나 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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