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이수인의 국민가곡으로 가람 이병기(1981~1968) 시조에 곡을 붙인 ‘별’이 있다.

‘별’은 1960년도 작으로 이수인의 첫 작품. ‘별’은 1970년 제2회 서울음악제에서 초연됐으며 합창곡으로도 편곡해 한국남성합창단이부르기도 했다.

테너 김화용·김호성등이 불러 레코드로 취입한 바 있다.

이렇게 인기를 끌었음에도 이수인이 가람을 직접 만난 일은 없었다.

‘별’은 시조시인 가람 선생의 대표시조 중 하나다.

그는 여러 면에서업적을 남겼는데 국학자, 예술가였으며 원예와 주도에도 도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문학을 역사적, 과학적으로 정립했고 많은 시조를 창작해 일석 이희승의 말처럼 “시조하면 가람을 연상하게 되고, 가람 하면 시조가 앞선다”고 할 만큼 우리나라 시조문학의 대가다.

익산에서 변호사 이채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시 ‘조선어강습원’에도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문법’도 수강했다.

사범학교졸업 후에는 전주의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1년 ‘조선어연구회(후의 한글학회)’를 조직해 간사가 되기도 했다.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25년 ‘조선문단’에 시조 ‘한강을 지나며’를 발표하면서. 이를 계기로1939년 ‘가람시조집’을 발간했고, 1940년에는‘역대시조선’과 ‘인현왕후전’을 발간했다.

1946년에는 군정청의 편찬과장을 지내며 서울대 교수를 겸임한다.

1948년에는 ‘의유당일기’와 ‘근조내간집’을 출간했다.

1952년 전북대 문리대학장에 취임했다가 1955년 중앙대 교수가 되었고, 1957년에는 학술원 회원으로 ‘국문학전사’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던 1958년뇌일혈로 쓰러져 병을 얻고 낙향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실어증으로 고생했으나 점점 나아져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직접 수상했고 1962년에는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66년 ‘가람문선’을 발간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7월 생가인 수우재에서숨을 거두었다.

유택은 바로 생가 뒷동산이며 생가는 도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교과서에 실린 ‘젖’·‘계곡’·‘대성암’·‘박연폭포’·‘난초’·‘매화’·‘봄’·‘비’·‘창’·‘냉이꽃’ 등이 있다.

선생의 시조 ‘별’은 넓은 들에 서있는 듯한 풋풋한 희망을 준다.

마치풀잎에 이슬이 맺히듯 그 말의 뜻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맺혀 자리한다.

마치 시조가 시로써 어떻게 감동을주어야 하는지를 웅변하듯 말이다.

한 소절 한마디 그 뜻을 음미해 보면 어린 동심에 몰입된다.

마음을몰입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희망을 일구는 원동력은 아닐는지….  “달은넘어 가고 별만 반짝”이던 아름다움을 이제 어디에서 찾아 볼 것인가? 선생은 우리 가슴에 지지 않는별을 심어 주고 갔다.

<한일장신대 음악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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