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였던가. 사람이 꽃보다 예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 역시 꽃보다 아름답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대로라면 들장미 같다고 할까. 서양화가이자 헤어디자이너인 고정순씨(53·전원미용실 원장)의 느낌은 그랬다.

특히 그가 자갈자갈 소리 내 웃기라도 하면 들장미들이 합창하는듯한 환상에 빠지곤 했다.

“후훗, 영화 ‘흐르는 강물’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고기가 물길 바라는 희망과 함께 모두 하나의 존재로 어렴풋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 결국 하나로 녹아 든다.

그리고 강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라는 말요. 마음이 하나로 녹아 들면 사랑과 인정의 강물도 순리대로 흐르지 않겠어요.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게 제가 사는 방식입니다.

” 순리를 따르면서도 희망을 놓는 법이 없는 그였다.

헤어 디자이너도 그렇고, 서양화도 그랬다.

그저 여건이 되면 시작했고, 절대 무리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다시 미대 진학을 꿈꾼다.

이 역시 아귀다툼할 생각은 애초 없으며 상황이 가능할 때 자연스레 도전장을 내밀 생각이다.

6회 갑오동학미술대전 우수상을 거머쥐면서 그는 올해 드디어 초대작가가 됐다.

미술수업을 시작한 지 8년만의 일로 갑오동학미술대전은 그와 인연이 많은 편이다.

벌써 세 차례 수상한데다 그를 당당히 초대작가 반열에 올려놓았으니….대야에서 오빠 둘과 동생 둘 사이 셋째로 태어난 그에게 ‘꿈’은 그저 ‘꿈’에 불과했다.

이런 형편을 익히 살폈던 그는 스튜어디스나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상경한다.

경리 일을 하던 차에 오빠 권유로 미용기술을 익혔던 게 어찌 보면 독립선언이었던 셈. “제 희망을 일구기 위해선 경제적인 독립이 필요했지요. 그래 검토했던 것이 간호사와 양장기술자, 미용사였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레 마음이 쏠린 것이 미용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어쩌면 그렇게 탁월한 선택을 했는지 몰라요.” 그게 22살 무렵. 6개월 수련기간을 거친 뒤에 이뤄진 취직경험은 평생 자산이 돼줬다.

당시 미군부대를 출입했던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첫 직장은 화려한 손님들로 넘쳐났고, 종일 주눅 들어 떨며 지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초라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러던 그가 전주에 정착한 것은 26살 때. 명동사우나 옆 ‘전원미용실’을 인수한 뒤 오늘에 이른다.

어느 정도 안정됐다 싶을 즈음,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수업에 들어갔다.

8년째 사사하고 있는 소 훈 선생은 은인이나 한가지. “다른 것은 몰라도 미술만큼은 꼭 성취하고 싶었어요. 서예를 즐기셨던 부친 때문에 먹을 갈았던 기억이 선명했거든요. 서양화를 하면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할까요. 본업은 헤어 디자이너지만 미술은 평생 함께 할 동지에 다름 아닙니다.

” 10여 년 미술에 투자했음에도 데생이나 크로키 수업은 여전히 그의 중요 일상. 고객 머리를 매만지는 작업도 그림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데다, 꽃을 다루는 솜씨 또한 뽐낼 만 하다.

이 역시 부친 고상현씨 어깨 넘어 배운 것들.꽃과 그의 작품들로 꾸며진 미용실은 전시장 버금간다.

몇 년 전 ‘어깨동무’ 영화 촬영장으로 제공된 것은 이의 반증. 허나 영화가 참패하면서 빛을 보지는 못했다.

전주시내 멋쟁이란 멋쟁이는 그의 손을 죄다 거쳤을 것이라는 그, 돈이 전부가 돼 가는 자본주의 허상에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거는 그, 오늘도 참 행복의 가치를 꿈꾸며 붓과 가위를 교대로 쥐고 인생을 디자인해간다.

“해질 무렵 바람이 불면 마악 흔들리는 풍경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것이 짜릿한 행복인 줄 압니다.

최고의 컨디션일 때 모든 일은 잘 풀린다고 하지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 깊은 정을 쌓고 좋은 풍경을 보는 일 다 만사형통을 이루는 일 아닐런지요. 그 사실에 감사하며 오늘도 파이팅하시지요.”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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