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속성 중에 하나가 속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또한 사람들을 지켜보면 거의가 긴장된 채로 빠른 속도 속에서 움직입니다.

자동차의 엑셀을 늘 밟으며 살아 온 우리는 어쩌면 브레이크를 밟는 멈춤보다는 엑셀을 밟는 속도감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멈춘다는 것, 끊는 다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입니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수많은 간판과 정보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눈과 귀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방어하는 만큼 내면의 자아는 긴장하게 되고 그 긴장의 피신처로써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한계의 중독에 갇히게 되기도 합니다.

 뒤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웃음과 노래와 유연한 춤은 자연과 더불어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아이들은 노래가 나오면 거침없이 율동에 반응합니다.

둥그런 벌레처럼 유연하게 꿈틀거리고 율동합니다.

그 표정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다양한 모습인지요.그러나 어른들의 표정을 보면 나이들 수록 거의 똑같은 모습입니다.

근엄하고 화가 난 듯, 지친 듯 한 모습들 말입니다.

또한 뭔가 지지 않겠다는, 아니면 내가 너 보다 더 똑똑하다는, 아니면 나는 특별하다는, 돈이 많다는, 내 자리니까 근접하지 말라는, 여러 가지 언어를 몸으로 표현합니다.

다 아시잖아요. 몸에도, 걸음에도 표정에도 언어가 있다는 것을…. 언젠가 우연히 마타스의 춤이라는 그림을 보고 오랫동안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습니다.

이후 저는 마티스 작품 가운데 춤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래전 춤 명상에 참가했다가 춤 속에 엄청난 치유의 힘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유연함 때문이었을까요? 자신의 에고를 놓아 버린 근원의 어떤 동작 때문이었을까요? 마티스의 춤은 철학적 사유로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춤이 있으려면 먼저 유연성입니다.

유연성이 없다면 절대 춤에 가까이 출 수 없습니다.

춤을 출 때 나라는 에고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나’가 있으면 절대 유연해 질 수 없습니다.

춤 속에 사람인 ‘나’가 남아 있으면 방해가 될 뿐입니다.

경직되어진 나’는 촛불처럼 녹아내리고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존재만이 촛농처럼 존재에 흘러 넘칩니다.

이것은 열림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이때 세상의 리듬은 춤입니다.

나무가 춤추듯이, 바람이 춤추듯이, 세상의 모든 꽃들이 춤추듯이,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면의 슬픔도, 고통도, 아픔도, 상처도 승화되어 춤의 미학으로 넘쳐흐릅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생명 있는 것은 능동적이다”라고.  마티스의 춤에서 그림의 핵심은 또한 조화로움입니다.

혼자 추는 춤이 아니고 둥글게 모여 닿을 듯 말 듯 한 손끝의 간극입니다.

닿을 듯 말 듯한,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또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물의 기포 같은, 즐거운 만남, 그 순간의 충돌이 싱징처럼 느껴집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자신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의 작품은 더욱 드러나듯 자신이 사라질 수 있는 행위 또한 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 속에서는 예술가도 사라지고 에고도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만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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