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무지의 자각뿐 아니라 외부로 향한 철학적 사유를 내부로 바꾼 전환의 계기일 것이다.

자신의 내부야 말로 허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는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내면의 바다를 인식하는 지점에 와 있다.

어쩌면 외적 거리는 내적 거리가 있고 나서야 생기는 것, 의식의 세계를 어느 정도 탐사한 이는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거대한 이치를 알게 되고 정직한 자기 성찰로 시작한 자기 안의 치유야 말로 진정한 치유이며 회복이며 성장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살아가면서 상처없는 이 어디 있으랴! 나도 한 때는 상처의 두려움 때문에 인간관계조차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듯 모든 사람들은 되도록 상처를 외면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상처로 인해 크게 성장 할 수 있고 자신의 참 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

 화가 뭉크는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캠퍼스에서 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화가이다.

그 중에서도 익숙한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은 충격이상이다.

처음 접했을 때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린 나이일 때 어머니가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누이도 그 나이에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뭉크. 곧이어 부친도 사망하고 또 다른 누이동생은 정신 분열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 역시 불행한 연애 사건에 휘말려 권총사고로 가운데 손가락을 잃는다.

그리고는 평생에 신경발작과 정신병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뭉크는 “난 병이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의 예술에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것은 자신에게로 온 얼룩진 상처와 한판의 춤을 추겠다는 것이 아닌가? 뭉크는 물론 치열하게 자신의 상처를 응시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고의 변화를 가지게 됐다.

예술은 상처의 응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아니, 삶 또한 마찬가지다.

내면의 추하고 얼룩진 상처를 진정한 마음으로 바라본 자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한 자는 타인에게도 비로소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상처는 남고, 상처는 결국 분노로 투사된다.

자신으로부터 외면 받은 상처들이 얼마나 많이 유령처럼 배회하는가? 상처를 응시하며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

‘뭉크’는 외부적으로 만난 상처 때문에 생긴 내면의 상처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 때 그는 자유의 영혼으로 거듭 났을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피하지 않고 자신의 상처에 꿋꿋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나약한 자신이 성장하는 일은 어쩌면 피하고 싶은 그곳에서, 외면과 내면을 응시하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인도자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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