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 아닌 온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향 땅 이웃들과 떳떳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돼서 더욱 기쁩니다.”

 10일 오전 11시 부안군 위도면 위도중고등학교 체육관.험난한 세월을 증명하듯 쭈글쭈글한 주름과 구부정한 허리의 60대 노인들이 서로 얼싸 안으며 회한의 눈물과 함께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이들은 바로 국가가 간첩으로 내 몰아 버린 역사의 산 증인인 태영호 사건의 납북 어부들. 지난 1968년 연평도 해상에서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 귀환한 뒤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온 당시 태영호 선장이자 선주였던 강대광씨(61)는 제2의 인생을 살기 앞서 나즈막한 목소리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난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간첩이란 딱지 속에서 처자식 외에는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냉대 속에서 죽으려고도 해봤다”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두발 쭉 뻗고 살아갈 수 있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는 이어 “숱한 나날을 가족들과 숨어 살며 눈물로 지내왔고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한 맺힌 원통 속에서 살아왔다”며 “국가는 나 말고도 더 있을 납북 귀환 어부들의 명예를 하루 빨리 살려줘야 한다”고 부탁했다.

간첩 누명을 쓰고 곧바로 고향을 떠나 인천에서 생활해 왔다는 이종섭씨(61)는 오명을 벗은 감회가 남다르다.

그간 자식들에게 간첩이란 오명을 숨겨온데다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9일이 바로 자신의 생일로 ‘무죄’라는 큰 선물을 받았기 때문. 이씨는 그간 자식들에게 이 같은 사실들을 숨겨오다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자 마자 즉시 큰아들에게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했지만 그간 설움에 목이 메여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저는 혹여 자식들이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취직하려 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분명 아버지의 간첩이라는 오인 때문에 자식에게 사실이 폭로되고 취업조차 하지 못할까 노심초사 해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이사를 수도 없이 다녔지만 다닐 때마다 사복 경찰이 언제나 날 쫒아 다녀 괴로웠다”며 “오죽했으면 경찰이 ‘너 때문에 못살겠다.

이사가라’ 협박해 이사를 간 적도 있다”며 지난 통한의 세월을 눈물로 씻어냈다.

이날 화합 마당 자리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준곤 상임이사와 김호수 부안군수 등 200여명이 참석해 납북됐다가 귀환한 후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살아오다 40년 하고도 7일만에 고향 땅인 위도를 밟은 15명 어부들을 위로했다.

김준곤 상임이사는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주민들을 향해 큰절을 올린 뒤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응어리를 오늘 위도 바다에 던져버리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며 “오늘부터는 지난 세월을 잊고 서로 화합해 살아 달라”고 당부했다.

김호수 부안군수도 “그간 어처구니없는 사법 당국의 날조로 많은 우리 주민들이 반목과 갈등 속에서 살아왔지만 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한 점은 결국 진실이 승리한 것”이라며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아직도 숨겨진 진실들을 찾아 내고 함께 웃고 함께 사는 따뜻한 부안을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이강모기자 kangmo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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