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규의 음악산책 – 홍난파 곡 ‘봉선화’ 

“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봉선화 물든 손톱이 첫눈 때까지 남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봉숭아는 4~5월 씨를 뿌리면 6월 이후 꽃이 피는데 씨를 뿌리지 않아도 스스로 퍼뜨리는 강한 생명력의 꽃이다.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해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귀국한 홍난파는 서울에서 대중계몽에 이바지할 잡지를 발행했는데 자금난으로 폐간되자 우울한 심정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사이 고향은 피폐해져 울적한 심사만을 더하고 있었다.

이웃의 ‘봉선’이란 처녀가 찾아와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져 이젠 그의 바이올린 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한 곡조만이라도 들려 달라 애원했다.

집이 가난해 학교도 가지 못하던 그녀는 난파에게서 글도, 노래도 배웠다.

그를 친 오빠처럼 따랐던 봉선화를 좋아하던 ‘봉선이’는 해마다 자기집 뜨락과 난파의 집 울타리 밑에도 꽃을 심었다.

그러던 그녀가 17살이 되는 해였고,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 살길이 막막하자 방직공장으로 일하러 가야만 했다.

이별을 앞두고 그를 찾아 온 것이었다.

난파는 그녀를 위해 ‘아리랑’을 켜려 활을 그었지만 가슴 속에서부터 저며오는 슬픔과 서러움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울분을 안고 뒤엉킨 감정에 새 악상이 떠올라 다시 활을 그어 나갔던 것이 바로 ‘봉선화’이다.

그후 작곡가는 울밑에 핀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아끼던 이웃 동생‘봉선’이를 생각했고 또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통탄해 했다.

이 시기 음악계의 선배요 절친한 사이인 김형준이 곡에 깃든 사연을 시로 엮어 가사로 붙인 것이다.

기록에는 1922년 작곡으로 나오며 원래 난파의 악보에는‘애수’라는 곡목으로 소개 되었으나 나중에 ‘봉선화’로 불리워졌다.

애처로우면서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곡이다.

일제가 너무도 민족적이라 하여 노래를 못부르게 하자, 많은 이들이 애국가처럼 몰래 숨어서 불렀다.

민족의 노래 ‘봉선화’가 국내에서는 이처럼 절대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인데, 8.15직전 소프라노 김천애 여사가 일본 동경에서 음악학교 졸업연주회 때에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감연히 나타나 곡을 독창했다.

이로써 거기에 모인 일본사람은 물론 한국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준 이래 해방 후 다시 그녀에 의해 널리 불려졌다.

그녀를 보면 ‘봉선화’를 연상케 되었으니,‘봉선화’와 그녀는 마치 김형준과 홍난파의 경우와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야말로 ‘민족의 노래 봉선화’였다.

<한일장신대 음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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