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침묵(沈黙)-묵언(黙言)을 두려워한다.

말이 없는 사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으므로 두려운 것이다.

말은 생각의 창구다.

생각이 뜬 구름 같다면 말은 그 뜬 구름을 붙잡아 비가 되어 내리게 한다.

그 비가 단비였으면 좋으련만 항상 좋은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니듯이, 생각의 비 역시 항상 좋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겨울비를 맞아 본 사람은 안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그 비정한 냉기를, 위아래 이가 맞부딪치며 요란하게 실로폰을 울려대는 살인적 한기를…. 그래서 그런 겨울비를 온몸으로 맞은 사람은 필시 중병이 들게 마련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수로 모든 가산을 잃는 이재민에게 내리는 비도 비정하기는 겨울비 못지않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그렇듯이 사람에게 내리는 비, 사람의 말 역시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아무리 말을 골라해도 발화되는 순간 말은 누군가의 상처를 덧나게 할 위험한 총칼과 같다.

그래서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거나, ‘세 치 혀는 사람의 몸을 베는 칼’이라는 금언이 갈수록 유효한 세상이다.

톨스토이도 함부로 하는 말이 불러올 위험을 경고한다.

“입을 다물면 후회할 일이 없고, 입을 열면 후회할 일이 많다.

그러나 내뱉은 말의 결과를 알게 되면 후회할 일이 더 많다”고 했다.

그러나 말은 소통을 불러오고, 소통해야 비로소 사람살이-세상살이가 가능하다.

말을 하지 않고서는, 소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적 삶은 불가능하다.

위험한 칼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검(殺人劍)도 있지만,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活人劍)도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말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는 단비도 되고, 사람을 중병 들어 죽게 하는 겨울비도 된다.

“나비는 어느 꽃으로 날아갈 것인가/ 뜰에 앉은 참새들 어디로 날고/ 나뭇잎 떨어져 쉼없이 굴러가고/ 동풍은 서쪽으로만 흘러 가겠는가/ 혁명 같은 함성이 문 열고 뛰쳐나갈 것인가/ 침묵은 바위의 숨결이고/ 눈 감고 다시 천년 가부좌로 앉을/ 부처의 설법/ 침묵은 그 잠언의 표절이다(박상옥 ‘침묵’전문. 그의 시집 ‘세월걸음’에서).” 말을 전매특허라도 냈다는 듯이 언론이 춤을 춘다.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이려는 의도를 담은 말은 보통이요, 한 집단을 빈사상태로 몰아넣어도 무방하다는 듯이 함부로 세 치 칼을 휘두른다.

심지어 한 지역을 집단 린치하면서 카타르시스라도 느끼려는지 조자룡이 헌 칼 쓰듯이 언권이 자행되고 있다.

공정하지 못한 말,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같지 않다.

지식이 내면화된 지성인의 말이 아닌, 권력과 금력의 앞잡이가 되어 외쳐대는 나팔수 노릇은 아니함만 못하다.

그 말의 결과를 알게 되었을 때, 그 후회를 어찌 감당하려 하는가? 지식인들이여, 그래서 차라리 침묵이 낫다.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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