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을 삶의 가장 큰 척도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축복의 말로 행복하라는 말을 건네고 스스로도 행복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너머로 슬픔을 또는 불행을 맛보기 십상이다.

그 것이 관계와 감정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순간,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 허무를 인식하면 다시 또 다른 알 수 없는 미지의 정신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는 순전히 정신적인 문제다.

물론 외부적인 감각의 경험을 거치면서 각기 나름 ‘앎’의 세계에 도달하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일이겠지만 말이다.

문득 찻집에 앉아 생각의 미로에 접어들었다.

  화두는 ‘행복’이었다.

수 많은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삶의 경계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행복할 수 있는지?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또한 우리가 이해하려는 세계는 바로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고찰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추상적인 사유보다 관찰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연구를 창시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달할 수 있는 ‘선’의 실천성을 강조했다.

참다운 ‘행복’에는 진정한 ‘선’이 함께하며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은 ‘덕’과 함께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중용’이론은 여기서 태어났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덕’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행복은 덕과 일치하고 행복과 덕은 ‘앎’의 유형이라고 보았다.

‘선’을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려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들어 ‘용기’는 만용과 비겁함의 중도이며 ‘자긍심’은 허영과 겸손의 ‘중도’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행복이나 덕이나 선은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 논의와 일치한다 이는 나아가 ‘인류애’와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개인에서 출발하여 최고의 정점은 인류애에 다다르는 것이다.

‘덕’으로 출발하는 기부자가 또 다시 더 큰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비밀에 있다는 것이다.

자선사업가, 기부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덕으로 다가섰을 때 그들은 서로 지지의 힘으로 만남이다.

그 지지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고 그래서 기부자가 더욱 부자가 될 밖에 없다는, 그러니까 하나의 긍정이 또 다른 긍정을 만났을 때 더 큰 에너지 부자가 된다라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다시 ‘부’를 불러들인다는 논리는 마땅하다.

생각해보라. 자선가 빌 게이츠가 더욱 부자가 되는 것은 이 시간 나 자신도 빌게이츠를 생각하며 엄청난 지지를 보내기 때문이다.

가족애를 넘어선 인류애적인 나눔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도달할 수 있는 ‘선’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들불같은 ‘인류애’적인 위대한 사랑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나름의 귀결을 음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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