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도심을 지나다가 정류장에 앉아 있는 늙은 노파와 가지런히 서 있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한 편의 퍼포먼스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름다웠다.

그냥 아무 정의도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길 가 모든 현상들이 퍼포먼스처럼 아름답게 느꼈던 기억은 삶이 예술이라는 나름대로 상상의 터널을 열어 주었다.

가끔 상상력은 나를 즐겁게 한다.

수많은 화두는 나를 갇히게도 했고 고독하게도 했으나 그 문을 열려는 의지는 관념을 늘 탐색하게 했다.

관념론은 “실재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라는 버클리의 이론에서부터 “경험적 세계는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된 현상의 일종”이라는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알 수 있는 것은 ‘겉모습’ 또는 ‘현상’뿐이며 이러한 현상들의 본성은 정신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상’을 넘어선 ‘실재’가 있으리라는 것을 옳다고 보았지만 실재의 인식은 부정했다.

사실 누군가의 실재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칸트는 이런 이론을 ‘선험적관념론’이라 불렀는데 이는 경험의 바깥에 서 있는 관점을 가리킨다.

나를 벗어나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 보면 숲만 보이지만 숲을 보는 것 말고 나무 하나 하나를 관찰해 보면 각자 다름의 형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의아하다.

그리고 그것이 각자의 관념의 문제로 넘어가면서는 신비롭다.

각자 각자는 자신의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은 그야말로 삶으로 남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현상이지만 각자 자신들에게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세상은 나름 공평하다는 지론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바깥세계는 무엇이든 미지로 남는다.

수많은 현상들 속에 존재의 나로서 그들과 존재를 맺는 것, 그것이 삶의 기쁨은 아닐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영화 속 ‘좀비’를 보면 어쩌면 이 시대의 상징성은 아닐까? ‘좀비’는 영혼이 없는 유령들이다.

그들이 세계를 장악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죽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자는 ‘좀비’와 마주서서 당당히 싸우는 자이다.

삶 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자, 체게바라가 그렇듯, 간디가 그렇듯 그들의 삶은 나에게 에너지원이다.

 현상은 상징적인 퍼포먼스며 표지이다.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상징이다.

그들에게는 내가 현상인 것처럼 그들은 나의 현상이다.

그 현상들은 존재로서 살아가기에 궁극적으로 그들은 화두를 제공하는 ‘책’이고 ‘시’이다.

결국 수많은 현상하고 접촉하며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존재하는 그들 자신은 상상하는 나에게 하나의 ‘길’ 위에서 만난 자이며 지나가는 자이다.

그 길 위에 놓여진 그들과 나는 아름다운 한편의 퍼포먼스가 될 수 있기를 꿈꾸어보며 ‘좀비’처럼 무익한 인간이 아닌 유익한 인간으로써 삶을 생각해보는 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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