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 전면을 가득 채운 대형 사진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고공낙하라도 하려는 것인지? 아스라한 높이의 철탑 위에 온몸을 묶어두고, 맥없이 늘어뜨린 대형 현수막에 적힌 구호는 함성이 되지 못한다.

누가 저들을 저리 높은 곳에 둥지를 틀게 했을까? 누가 저들을 저리 높은 곳으로 내몰았을까? 외로운 외침에 메아리가 없다.

“비정규직 차별도 서러운데 정리해고 웬 말이냐!” “3년 가까이 저항해 온 승무원들의 생존권을 걸고 40m의 철탑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고 호소한다.

누가 저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누가 생존권을 빼앗아가려 하는가?집단정리해고, 계약해지…, 근로자들을 옥죄는 편법은 공동체 사회를 뒤덮는 먹구름이 되어 힘없는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기륭전자에서, 이랜드에서, 코스콤에서, 그리고 철도청에서, 소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빼앗긴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투쟁에 눈시울이 젖어온다.

누가 저들 삶의 의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가?생존은 엄숙한 것이다.

누구의 것이든 생명 있는 존재의 몸부림은 존엄한 것이다.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하루살이의 그것일지라도 함부로 생명의 존엄성을 헤쳐도 좋은 권한을 부여받은 이는 없다.

하물며 인간이지 않은가! 절대가치와 존엄의 극치인 사람이 아닌가!생명에 닥치는 위험을 앉은 채 당할 수 없어서,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가정에게 닥치는 불순한 협위에 굴복할 수 없어서, 저 가난하지만 당찬 노동자들은 아스라한 철탑 위에 올라가 자존의 불을 켠다.

그리고 침묵하는 세상을 향해 포효한다.

자본의 횡포에, 권력의 협박에, 언로의 왜곡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노동자들의 유일한 무기인 육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려 한다.

철탑을 촛대 삼아 스스로 촛불이 되고자 한다.

“우리도 일하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피맺힌 외침이 “우리도 인간이다!”는 엄숙한 하늘의 소리로 들린다.

저들의 절규에 응답하라.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라. ‘순천(順天) 자는 흥(興)하고, 역천(逆天) 자는 망(亡)한다’고 했다.

그런 말씀을 진리로 알고 살아왔으며, 그런 가르침이 진리가 되기를 바라며 살아온 순한 백성이 아닌가!  “발을 하나 들어야겠다/ 시린 강물 속에서/ 두 발을 담그기엔 너무 힘들어// 먼동이 트려면 아직도 먼데/ 세월은 수상하고/ 갈 길은 아득하다// 꿈마저 저버린 해오라기의 비상/ 수면엔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다(주봉구 ‘해오라기의 경제’ 전문)”.  수상한 시절의 처세술은 따로 있지 않다.

온몸으로 촛대가 되어 시대의 어둠을 밝히거나, 온몸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증명하는 길뿐이다.

하나의 촛불은 나약하다.

그러나 어깨동무하고 밝혀든 촛불은 위대하다.

언제 먼동이 틀지 알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밝히고, 숨죽인 지성을 일깨우며, 얼어붙은 양심을 흔드는 힘이 있다.

한 발 들고 냉혹한 시대를 건너가는 해오라기의 모습이 철탑 위에서 세상을 건너가려 몸부림치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온전하게 오버랩 된다.

비상하기 어렵다고 행여 꿈마저 저버리지는 말기를, 철탑 위에서 몸부림치는 수상한 시절의 해오라기에게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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