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피면 언덕 공원에 북적대는 사람들이 신기합니다. 언제 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나 싶게 말이지요. 세상의 손님들은 다 모인 것 같아요. 누구나 귀한 손님이지요. 그곳에 해가 저물어갑니다.이토록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이다니요.

”그가 분재 전문가라는 말을 듣고 문득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유년시절’중 이 구절이 떠올랐다. 꽃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십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매혹적인 벤야민 에세이에 줄을 쳐가며 세상사는 행복을 얻었던 기억이 다시 생생해진다.

60을 넘은 나이에도 교육자로 연구가로 쉼없는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 나영길씨./이상근기자lsk74@

백당분재연구원 대표 나영길씨(64·전북대평생교육원 분재 전담교수). 그는 화훼예술학박사 1호다. 1970년대부터 일본 자료들을 들춰가며 불모지였던 이 땅에 ‘분재’뿌리를 내렸다. 천안 연암대학(구 연암축산원예대학)에서는 강단에 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책도 여러 권 냈다. ‘분재학총론’과 ‘분재수형학’ 등등이 그것. 그럼에도 아직 분재학이 버젓한 학문행세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은 적잖다.그나마 건국대 석사과정에서 이를 다룬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는 정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가 도전하는 것은 ‘분재미학’이라는 책 발간. 분재를 미학적으로 들여다보면 할 얘기가 많다며 나무 성장 억제가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등 비판론에 대해서도 대립각을 단단히 세운다.

“그건 잘 모르는 사람들 얘깁니다. 나무를 씨앗단계서부터 발아해서 키우고, 또 수형을 잡느라 잠시 철사를 묶어두는 데 불과하죠. 다소 인위적인 기법이 동원된다고 해서 비판 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40여년 동안 분재와 씨름했으니 그 노하우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체계를 잡고 싶다는 것도 그의 또 하나 바람이다.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학문화가 가능할 것이라며 그게 1세대로서의 몫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가 분재와 연을 맺은 것은 20대 중반. 정읍에서 사과과수원 하던 부모로 인해 어려서부터 나무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또 가까이에 두고 사시사철 감상할 수 있다는 매력에 끌려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분하고 끈기 있는 자신의 성격과 잘 맞았다.

“나무를 대하고 있으면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져요. 사람들과 관계한다면 권태기도 있을 법한데 나무는 평생 두고 살아도 질리지 않아요 그래. 저하고는 궁합이 잘 맞는 모양입니다.” (웃음)

 나무를 워낙 좋아하는 까닭에 가까이 두고 즐기는 자체가 좋았다. 그 심중엔 생명력에 대한 매력이 가장 컸다. 사시사철 오묘함을 보여주는 것이 기쁨이었기 때문. 그렇게 즐기기를 20여년, 천안 연암대학에서 교수초청이 왔다. 사업이 제법 잘 되던 시기였으니 고민은 적잖았다. 허나 학문 만드는 일을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결심으로 학교행을 택하고, 나이 43살에 이뤄진 새로운 선택이었다.

사업도 버리고 선택한 만큼 분재학 기초를 만드는 데 열정을 다한다. 그럼에도 원예도 아니고 화훼도 아니라는 점에서 늘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다 해도 그는 정열을 멈추지 않았다.
정년과 함께 그는 전주 삼천동에 8백여평 부지를 마련한다. 백당분재연구원을 만든 것은 이 즈음.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교육자로, 이후 사흘은 2만점 정도의 나무를 가꾸며 본연의 나로 돌아간다.

아름다움엔 모두가 지기 마련인가. 특히 잘 다듬어진 나무가 주는 아름다움은 비길 데 없다. 그것을 이기지 못해 헤매는 이, 아예 눈감고 지내는 이는 또 얼마나 많은가. 벤야민의 그 봄날, 아니 나 대표의 그 나무들을 끌어안고 흘러가는 세월 어찌 아름답지 않을손가.

“행복에는 반드시 이면이 있는 법입니다. 연애할 때는 늘 가슴 두근거리고 즐겁지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기라도 한 다음에는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행복해지려면 나름대로 각오가 필요한 법입디다. 하지만 나무를 사랑해보세요. 나무는 정직합니다.”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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