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순시인
“지구 안쪽 바람에 쓸리는 춘란 한 분/ …/ 불러도 응답 없이 詩 속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는데/ 몇 천 년의 긴 겨울밤을 지나온 자리/ 황홀한 춤으로 피었다/ 오오 장한 시간의 힘이/ 그늘을 박차고 생기로 밝았다/ 오늘 활짝 열었다.”

(‘꽃의 진실’중 일부) 황영순 시인(59). 그가 모처럼 시인으로서 나들이를 했다.

최근 시집 ‘짧고도 긴 편지(연인M&B 刊)’를 펴낸 것이다.

그 안에 들앉아 있는 시편들은 도무지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사랑을 품어 알뜰하게 부화시킬 뿐, 시의 우물 안에 들앉아 고집스럽게 웅숭그리고 있다.

아마도 한동안 칩거 비슷하게 살다가 꽃처럼 환하게 세상으로 돌아온 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것은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시선을 조금만 바꿔 보면 그의 시편들에서는 사유의 힘이 넘친다.

생기 발랄해서 읽는 이를 황홀하게 하기도 하고 그 깊이를 헤아리게도 한다.

그제서야 그가 자신의 시를 ‘꿈의 주소들’이라고 소개한 내막을 이해할 것도 같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러니까 1996년 ‘제1회 전북여류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던 무렵 같다.

인터뷰 차 전화 드렸더니 “자신은 현재 아프다”면서 곡진하게 사양하던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그러다 올 봄 김제 청운사에서 뵌 게 첫 대면이었다. 꽃으로 치자면 크고 풍성한 함박꽃 정도, 그는 그렇게 너그럽고 풍만한 표정이었다. 염화미소를 짓는 시인의 넓은 품으로 금방이라도 첨벙 뛰어들고 싶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칩거 얘기는 문학판 언저리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였으니 그의 아픔도 적잖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신앙과 남편의 도움으로 세상과 화해했다. 이 시편 역시 그 화해의 과정에서 변주된 이미지에 다름 아닌 셈이다.“사랑의 마음으로 치유 못할 것은 없다.

나는 사랑의 시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나의 시 ‘꿈의 주소’를 가만가만 읊조리며 세상 속으로 건너간다.” 그는 시를 통해 비로소 사랑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하여 미움과 불신을 죄 버림으로 허허벌판이던 가슴에 드디어 봄날 아지랑이가 번지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세상과 조우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랑 없이는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음을 알게 됐다.

마음을 열고 사랑에 흠뻑 젖어 있을 때, 비로소 삼라만상이 심안으로 열려오며 시의 씨앗이 움트고 노래가 가슴을 타고 흐르는 걸 알았다.

화평 없이 시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가족들의 보살핌이 있었고 신앙의 힘과 지인들의 사랑이 있었으니 이 세상에 홀로란 없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깊은 성찰이 필요했고, 시문학에의 간절함이 자신을 소생하게 해줬다.”

그에게 시와의 결별은 죽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를 반증하는 것일까. 그는 상복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뒤 2년 만에 ‘한국예총회장상’을 탔고, 이어 ‘전북여류문학상’, ‘백양촌문학상’, ‘노산문학상’, ‘임실문학상’까지 거머쥐었으니 이를 뉘와 비기랴. 시집도 적잖았다.

‘한같이 그리움같이’ ‘내가 너에게로 가는 이 길’ ‘네가 내 사랑임에랴’ 등으로 독자들과 만나왔던 것.그런 그가 어찌 시를 쓰지 않고 살 수 있었겠는가? 가혹한 시련이 늘 눈에 밟혀 애틋했을 것이나, 시를 통해 세상도 온전히 껴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가 아름다운 시편과 함께 다시 태어났으니 환영한다는 ‘짧고 긴’ 엽서 한 장 띄우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을, 당신의 소생을 기뻐합니다”라고./김영애기자 young@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