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춤 전도사, 생활무용 전도사, 훌라 전도사…. 그에겐 유독 전도사라는 꼬리표가 많이 따라붙는다.

허나 그의 본업은 발레리나다.

다만 ‘실용’을 중시하다 보니 자연스레 변신하게 됐을 뿐이다.

그가 무대라도 설라치면 그 순간 공간은 환하게 살아난다.

화사한 빛깔로 물들이는데다 화려한 춤사위가 나비처럼 부유하는 연유다.

대중성을 강조하는 손정자 우석대 무용과 교수(59)의 40여년 무용인생은 그렇게 물들어갔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재미있게 놀고 웃는 거라지요. 우울했다가 심심했다가 깔깔대다가 눈물 흘리다가 이렇게 바쁘게 살다가도 적적해지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인간이요. 춤은 사람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특히 노인들에겐 아주 좋지요.” 그가 주창하는 ‘실버춤’과 ‘생활무용’ 모두를 합치다 보면 어느새 만나는 게 ‘훌라’. 스트레칭 효과와 함께 디스크, 치매예방까지 한 몫에 거둘 수 있는데다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 한 곡 추다 보면 몸이 가뿐해지고 활력이 솟음을 장점으로 꼽는다.

뭐니뭐니해도 노인들에게 최고라는 것이 그의 주장.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노인들에게 ‘훌라’ 만큼 좋은 춤이 없어요. 정적이면서도 우아해서 접하고 나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도 ‘훌라’입니다. 그뿐 인가요. 기본 동작만 익히면 금세 한 곡 거뜬히 출 수 있으니 입문하기도 쉽지요.” 그가 ‘훌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일본 유학시절. 1년 동안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으로 일어났던 ‘훌라’ 붐을 눈 여겨 봤다.

무엇보다 실버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는 당장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귀국 후에는 하와이 원정까지 나섰다.

거기서 만난 ‘무나 선생’은 그에겐 훌라 스승. 그 덕분으로 2001년 9월부터 우석대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2007년에는 아예 ‘훌라스튜디오’를 차리기에 이른다.

“하와이는 훌라로 인해 제2의 고향이 돼버렸어요. 갈 때마다 레슨도 받고 작품도 받아오곤 했는데 지난달엔 실버대회 참가했다가 상도 받았답니다. 훌라는 제 인생을 새롭게 열어준 매개인 셈이지요.” 그는 지난달 24일부터 ‘하와이섬 코나’에서 열린 실버대회에 참가했다.

개인과 단체전에 출전해 상품으로 우크렐레 악기는 물론 호놀룰루 시장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그에 그치지 않았다.

호놀룰루 동호회 페스티벌에도 동참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생활무용’에 쏟은 열정만큼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1997년 시대흐름을 간파한 그는 무용과에 발레와 재즈, 힙합 댄스를 한데 묶어 새로운 경지를 연다.

덕분에 학교를 떠난 제자들은 힙합·재즈댄스·댄스스포츠·에어로빅댄스 지도자로 속속 자리를 잡았다.

순전히 그의 선견지명에 의한 것이었다.

“순수무용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린 지 오래고, 뭔가 전환이 필요했는데…. 그때 생각이 미친 게 생활무용입니다. 마침맞게도 매스컴은 댄스스포츠나 재즈댄스에 대한 관심을 막 쏟아냈어요. 이를 믿고 과감하게 생활무용으로 바꿨는데 그게 성공한 셈이네요.” (웃음) 전주에서 태어난 손 교수의 꿈은 본래 ‘교사’. 초등학교 시절만해도 음악에 비중이 실렸으나 중학에 진학하면서 무용과 연을 맺었고, 급기야 수도사대(현 세종대)에서 발레를 전공한다.

졸업하자마자 전주중앙여중 교사로 부임한 뒤 모교인 성심여고로 옮겼고, 1979년 우석대 교수로 임명돼 오늘에 이른다.

지도자 꿈을 이룬 그의 희망은 ‘전북 훌라메카 만들기’로 다시 한번 진화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정성을 다하는 그답게 모르긴 해도 그 꿈은 조만간 이뤄질 것이다.

끊임없이 사과나무 심기를 멈추지 않는 그에게 갈채를 보낸다.

“인생은 내 탓 할 때 희망이 보이고, 마음이 부드러운 물 같다면 고난 속에서도 푸근할 수 있지요. 무엇에든 정들기까지 참아야 하는 순간이 있고, 비로소 큰 원 같은 둥근 마음으로 성장한다고 봐요. 사는 일은 정성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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