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숙 목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님의 시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전주중부교회 3대 담임 박종숙 목사(48). 당초 목회자를 꿈꾸던 그가 방황하던 시절엔 무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비로소 하나님이 불러주었을 때 하나의 의미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름 불러주기’라는 명명으로 인해 그의 긴 방황은 끝이 났다.

서울대 철학과는 당초 목회자가 되기 위한 전초전이었으나, 정작 대학시절 그는 신앙에 대한 회의로 도피행 군입대를 자처하고 결국 독일 유학까지 강행한다.

물론 ‘신학’이라는 근접한 학문을 택했으나 성서의 고등비평이 가능한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

그러다 전환기를 맞은 것은 독일어 교습차 선택한 ‘시골 성경학교’. 순수하게 봉사하는 독일청년들 믿음에 감동받은 그는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기에 이른다.

“20대의 회의감과 갈등은 말로 못합니다. 수적 교단에서 성장한 때문인지 대학생활에서 많은 충격이 왔어요. 현실적 고민을 잊고 싶어 레바논 평화유지군에 자원하려고도 했고, 그것도 여의치 못하자 도피행으로 선택한 게 군대였지요. 허나 캠퍼스에 복귀한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결국 독일청년들이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셈이지요.” 회심은 했으나 너무 멀리 와 버린 탓에 절차는 복잡했다.

결혼하기 위해 귀국한 그는 연세대 신학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다시 장신대 신대원를 졸업하고 나서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게 1999년, 그러니까 서른아홉이라는 적잖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다시 ‘신학교수’는 복병이었다.

한동안 소망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음에도 ‘신학교수’ 요청을 받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불거진 ‘호주 이민교회 목사 초빙’은 그를 원위치로 돌려놓은 사건에 다름 아니었다.

30여년을 에돌아서야 제자리에 돌아온 셈이었다.

호주에서 7년 반. 초년병 목사시절은 타국에 있는 동포들과 함께 흘러갔다.

방황기에 체득한 삶에 대한 처절한 탐색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데 주효했다.

그러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시점에 우연찮게 전주중부교회와 인연이 닿은 것이 오늘에 이른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전주에서 살게 되다니요. 전주는 군대생활 조금 한 거하고, 한일장신대에서 강의 조금 한 것이 전부인 데…. 하나님의 계획은 당최 인간으로서는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여수에서 태어난 박 목사는 초등학교 시절 신실한 어머니 덕분으로 교회에 입문했다.

이후 목회자를 소원할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는 서울대 진학으로 불신자였던 부친을 전도했을 정도였다.

“그때만해도 교회의 보수성이 각별했지요. 주일이면 공부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제게 하루는 부친께서 폭탄선언을 하셨어요. 서울대만 들어가면 교회에 가시겠다고요. 그래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리고 서울대를 갔는데, 그 해 여수고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세 명이나 배출되는 이변을 연출했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감탄하게 합니다.”

도전을 즐기는 편인 박 목사.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방편의 하나다.

호주에서는 스카이다이빙과 번지점프를 즐겼고, 귀국해서는 마라톤으로 심신을 단련시키곤 한다.

독일유학도 그 도전정신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성령론’의 전문가답게 박 목사가 내세우는 신앙의 기본은 ‘균형감’. 지성주의와 신비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며 웅혼한 사유의 깊이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의 설교가 “많은 일이 벌어지는, 길고 흥미로운 여행”으로 풀이되는 ‘오디세이(Odyssey)’처럼 재밌고 흥미로운 이유들이다.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지만, 그러면서 인생 앞에 겸손할 수 있는 거지요. 늘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자, 인생의 향기 옷깃에 가득하고 축복의 향기 영혼에 가득하겠죠. 믿지 않는 자라도 마음을 청소하면 성자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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