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구사회교육부장

   온통 ‘힘들다’는 소리뿐이다. 길거리 노점상, 시장 상인, 사업하는 친구를 만나도 ‘죽을 지경’이라는 같은 소리다. 밥집도, 노래방도, 술집도 ‘파리 날린다’고 아우성이다. 

  전주는 아직 덜하지만 서울은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다고 한다. 서울 분위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돼 있다. 전주는 원래 좀 더딘 편이라고 한다. 부지불식중에 외투를 여미게 된다. 

  주변에서도 주식과 펀드 등에 투자했다가 몇천만원에서 많게는 몇억원까지 손해를 입었다는 탄식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파장이 큰가 보다. 한 때는 펀드에 투자해 큰 재미를 봤다고 소문난 친구들까지도 ‘다 까먹었다’고 한다. 금융권 종사자들은 자신의 손실은 차치하고 주위 사람들의 눈총에 괴롭다고 한다.

  한 때 좋은 시절도 있었으련만 현재는 무일푼이다. 앞날도 암울하니 모두가 무기력에 빠져있다.
 
목적을 잃고 시작된 질주 

    ‘스프링 벅’의 비극을 생각하게 된다.
  아프리카 남부 칼리하리 사막에 사는 영양의 일종인 스프링 벅은 일정 시기가 되면 집단으로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맞는다. 수천, 수만 마리의 거대한 무리가 평원을 질주하다 절벽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이것을 동물들의 신비한 집단 자살로 해석했다. 한 동물학자가 이들의 집단행동에 관심을 갖고 원인 규명에 나섰다. 신비로운 이야기가 될 성 싶었지만 속내는 허망하다.

  스프링 벅의 집단행동은 자신의 목적을 잃고 집단으로 내달리다 벌어진 참사였다.

  사막에 풀이 돋으면 5, 6마리씩 무리를 지어 살던 스프링 벅은 초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무리가 모여 수백마리가 되고, 그 무리가 더해져 수천마리, 수만마리로 불어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거대한 무리가 초원을 가로지르며 풀을 뜯다 보니 뒤쪽에는 풀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풀을 먹지 못한 뒤쪽의 무리들이 풀을 찾아 앞으로 나가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앞쪽에서 풀을 다 먹어 치워 남아 있는 풀이 없으니 앞으로 밀치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뒤쪽 무리들의 걸음이 조급해지면서 앞서가는 무리들의 엉덩이를 들이 밀게 되고, 뒤쪽 무리의 속도가 파도처럼 전달되면서 어느 순간 무리는 질주를 시작하게 된다. 앞쪽의 무리는 뒤에 밀려 달리게 되고, 뒤쪽의 무리는 앞의 무리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달리게 된다.

  그 거대한 무리의 질주는 대초원을 가로질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계속된다. 이제 그들은 당초에 찾던 풀을 보지 못한다. 질주의 본능만이 남아 내달리게 된다. 그러다 그 초원의 끝 낭떠러지 앞에서도 질주를 멈추지 못하고 바다나 강으로 떨어져 죽게 된다.

  단순히 풀을 뜯기 위해 시작된 걸음이 질주로 바뀌고, 나중에는 무작정 달리게 된 것이다. 목적도 잊은 채 내달리다가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은 스프링 벅을 생각하게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목적을 잃은 채 질주하다 파멸에 이르는 스프링 벅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걸음 멈추면 발밑에 행복

   지금 우리는 돈에, 권력에, 자식교육에 홀려 있다. ‘좀 된다’는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달려든다. 부자, 권세, 1등이라는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를 뒤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자아와 정체성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의 사치로 치부된다. 끝도 모른 채 무작정 내달리고 있다.

  스프링 벅의 비극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데 있다. 무리 속에 휩쓸리다가 목적도 잃고, 꿈도 잃고, 삶도 잃은 것이다. 뒤돌아볼 겨를 없이 남들을 좇아 질주하다가 목적지를 깨닫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질주의 무리에 합류하지 않았었더라면, 질주가 시작된 뒤에라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면 자신이 찾는 행복이 발밑에 깔려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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