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통 속에 있다면, 고난 속에 있다면, 상실을 경험한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머리를 모래에 묻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 상실을 특별한 목적으로 누군가가 당신에게 주려는 선물로 여긴다면 당신은 성장할 것이다.” 이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에 실린 내용의 일부분이다.

이는 고난이나 고통, 상실에 대해 받아들이는 시점이 확연하게 다른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기에 기억하는 내용이다.

보이지 않는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모험이지만 당연할 것 같은 삶은 또한 허무주의다.

단 한번뿐인 생이고 주어진 조건과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해지는 어느 날 우리는 문득 섬처럼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상과 현실의 괴뢰에 서면 우리는 한없이 나약한 나를 만나게 되는데, 누구나 자기 안에 그런 나약한 나가 없는 이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런 나와 맞서는 것은 또한 고독한 나 일뿐이라는 명징한 사실.니체의 허무주의는 그가 긍정이라는 가치에 대해 온 몸으로 뜨겁게 이야기하고자 저 밑바닥 깊은 허무에까지 이르렀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바로 오늘날의 유행어 긍정의 힘이다.

껍질을 벗고 태어나는 생명처럼 새롭게 청조되어야 하는 것은 붕괴되고 가면이 벗겨져야 하는 것으로, 새로운 가치는 전복으로부터 시작이다.

생성자체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소멸의 기쁨까지도 지니는데 기쁨으로의 삶은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갖고 있지 않기에 허무주의로 시작하지만 긍정의 가치로 다다르는 ‘여정’이다.

우리는 어는 날 문득 삶을 선물 받는다.

그러나 삶은 하루아침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아지지도 않는다.

게오르규의 ‘25시’는 삶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수난을 다룬 내용이다.

13년이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용소를 전전하는 모리츠, 게오르규는 주인공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절망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그려 나가지만 폐허의 시간 속에서 그가 온전하게 갖게 되는 시간은 짧기만 한데…. 가족과 재회한 모리츠는 그 짧은 시간에 여한 없는 충만감을 갖는다.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힌두어로 존재는 선의 동의어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의 동의어는 악이라고 한다니 존재함은 인간이 무의미에서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으로 니체의 허무주의는 우리를 삶을 여행하는 자로서, 성장하는 자로서, 스스로에게 길을 제시하며 극복이라는 계단을 오르며 걷고 뛰고 춤추는 법, 환하게 웃는 법까지 배우는 어린아이로서의 제시이다.

시대의 몰락과 인간성 상실, 또한 신의 죽음을 딛고서 우리는 진실로 삶을 살아내는 열정 어린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배우기 위해서의 허무주의 고찰이며 시대의 고발이며 자기 자신의 해체, 그리고 그런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 자기 자신과의 유희로서 ‘생성’하기 위해서이다.

허무의 인식은 열정으로의 삶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시점의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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