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밟고 살던 사람에게 있어서 도시 문화의 전형인 아파트 문화의 삶은 견디기 힘든 허공 체험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견디기 힘들었던 허공 체험의 삶에 익숙해져 오히려 즐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저 역시 그런 도시 문화를 즐기고 있는 듯합니다.

전화 한 번이면 모든 주문이 가능한 편안이라는 삶의 신비를(?) 깨닫고 있는 중이니까요.마음과 삶에 상처를 내는 것은 매우 견디기 힘든 삶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서는 힘들다 아프다 하면서도 그것 또한 즐기게끔(?) 된다는군요.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내는 삶이 즐겁다(?)” 참 이상한 이론이지요.삶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가까운 이들이 “왜 그렇게 사니? 생각을 바꾸면 행복해지는데 이제 그만 그곳에서 나오지 그래!”라고 말했을 때 “어쩔 수 없어! 나는”이라고 하며 여전히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삶의 자리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이의 불행에 익숙한 삶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그 이론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어지는 삶을 견디어내지 못하면 몸에 병이 오거나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여기기에 인간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자기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즐기려 한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지 궁금한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서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내며 그것에 익숙해져가는 자신을 즐기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한 모습임이 분명한데 미워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닌 줄 알면 그만 두면 될 텐데 끝없이 미움의 끝을 붙잡고 사는 우리네 인생이여! 조금 달리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즐겨야 하는 생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정서가 우리의 몸에 익숙해져서 슬픈 삶을 살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살게 된다면 나는 진정 행복한 존재일까를 용기를 내어서 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진정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삶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는, 그래서 행복해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시는 주님을 통해서 보아야 할 복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시지요. 그래서 날마다 주어진 부활의 아침에 새로운 형제를 가슴에 안는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유석 목사(남원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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