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상 호한나라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광의적인 의미로 말하면 지구의 표면이 산과 물로써 교착되고 수식되어 있으니 이 땅에 생을 의탁한 생물의 하나인 인생으로서 산과 물에 대한 관계가 어찌 긴밀 두자(二字)로써만 형용될 것이랴.

  인생의 생활을 먼저 물질적 측면으로 보면 우리가 일상으로 한없이 이용하는 의식주가 대개 산과 물에서 취재(取材)하거니와 정치적 국가적 방면으로 보더라도 그 조직의 구체적 형태가 일정한 산과 물의 환경적 결정을 받는 것이며 도덕과 예술문화에 이르러서도 그 관념적 요소와 미감적 방향이 또한 산과 물의 지대한 영향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산과 물은 곧 인생의 실가(室家)이며 사회의 태반(胎盤)이며 생활의 근거이다.

  그중에도 특히 사막과 동토대(凍土帶) 같은 불모의 지역을 벗어나서 불식락강(不息洛江)의 자연을 벗삼아 근서무농(勤書務農)과 고가전범(古家典範)을 밝히면서 가산려수(佳山麗水)에 묻혀 자기의 향토로 한 사회에 있어서는 산과 물의 은혜를 과연 무엇으로써 보답할 것인가.

  명산승수(明山勝水)로써 천혜를 자랑하는 국민이 동서고금에 적지 않지마는 그 무엇이 이 땅의 산과 물에 미칠 것이며 그 누가 이 민족에 따를 것이냐.

  이 민족과의 접촉이 가장 오랜 한 민족의 말을 들어 볼지어다

  봉래(蓬萊)가 모두 이곳에 있고 진인(眞人), 선자(仙子)가 모두 이곳에 살고 불사국(不死國)이 이에 있고 불사약(不死藥)이 이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재생일견을 탄원한 금강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잔산단수(殘山斷水) 어느 것이라도 이 땅의 영내에 존재한 것이라면 모두가 자연미의 최고 이상을 체현(現)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산과 물은 실로 뮤우즈의 궁전이며 묘법(妙法)의 세계이다. 산의 아름다움은 스위스에 버금가고 삼면환해(三面環海)에는 그리스와 이태리에 유사하며 더구나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전설, 도덕, 예술, 제반 등을 한번 비교해 본다면 차이는 있을지언정 소질과 성격에 있어서는 도리어 우수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지령(地靈)인걸은 결코 무의의(無意義)한 고어(古語)가 아니니 이 천혜의 산과 물에 대하여 우리가 만일 감사보답의 뜻을 표하려면 최상의 방법은 오직 각자 성원이 구투향상(舊套向上)하여 훌륭한 인걸이 되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향의 산과 물을 빛내고 휴가철이 한창인 요즘 우리가 자랑하는 금수강산이 오염되지 않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즈음 서절(暑節)을 당하니 우리는 거의 전사회적으로 휴가다 하여 산과 물에 다다르고 있다. 자연의 총아인 인생은 각자 생활의 길을 좇아서 자연의 품으로부터 속세의 구렁에 들어 갔다가 피서와 납량의 시즌을 기회로 하여 다시 자연으로 돌아오게 되니 산과 물의 락은 이에서 인생의 참다운 영역을 전개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혜의 산과 물을 대할 때에 그것을 한갖 피서납량의 경계로만 인식치 말고 한걸음 나아가 계시의 신과 신앙의 조(祖)로서 경건히 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산과 물은 속세의 번뇌를 뿌리치고 청량과 유심(幽深)을 자랑하는 편성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는 번뇌를 포용하고 청량을 보편화시키는 애(愛)의 존재이다.

  우리는 위대한 교훈을 이에서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옛철인은 말하였거니와 유색(由色)은 청정신(淸淨身)이요, 계성(溪聲)은 광장설(廣長舌)이라고 옛시인 또한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구태여 옛선현의 배물교적 (拜物敎的) 심리로서 산과 물을 신앙할 것이 아니라, 도의적 자각과 자아적 반성으로서 산과 물의 본체에 접촉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맹산서해적(盟山誓海的) 결심으로써 산같이 견고하고 위대하고 웅준한 것이며 물같이 명철하고 활발하고 심장(深長)할지어다.

  산과 물에 놀아 산과 물을 배울지어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는 우리가 자랑하는 금수강산을 잘 보전하여 자손만대에 물려주는 것만이 우리 모두의 최대 과제이자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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