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필자가 공군장교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미 정보 분야에서 근무를 할 때 미 공군 대위와 중위가 중요한 군사 전략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 두 장교는 한 이슈를 두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군대 조직의 딱딱한 위계나 격식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며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의 설전을 벌여도 결말은 쉽게 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토론의 시간이 꽤 지나 마침내 대위가 말했다. “의견의 결말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니 이렇게 합시다. 각자 의견에 일리가 다 있지만 지금에서는 군 경험이 더 많고 내가 계급이 높으니 내 뜻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중위는 군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편한 자세로 있던 모습을 바로 추스르며 벌떡 일어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일사분란하게 과업을 처리해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관계’보다 ‘교류’를 중시하는 문화 필요
 
개인적으로 체험한 한 에피소드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존중해야할 사회적 가치가 모두 응집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안에 대해 위계질서를 떠나 수평적 구조로 격의 없는 토론 과정을 거쳐 결론이 순리적으로 도출되고,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수용하여 목표로 매진하는 수평성, 합리성, 신속성, 효율성, 전문성, 상대성이다. 지금 21세기가 된 우리사회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다.

어떻게 보면 21세기의 사회문화체계가 큰 물줄기처럼 선진 가치를 요구하고 있는 데에도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20세기적 고정 관념과 행동양식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갈등과 번민이 지배하고 있는 양상이다.

서구 선진사회의 네트워크는 ‘교류(communication)'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사회는 ’관계(relationship)'를 더욱 중시한다. 관계 중심의 사회 구조는 모든 부문에 걸쳐 학연, 혈연, 지연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는 곧 수식적 사회질서를 고착시켜왔다.

이러한 사회구도는 선진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적 평등성과 사회적 균등성을 이룩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왔다. 관계 중심의 사회 가치관은 지나친 경쟁심리와 비교문화를 조장하여 우리 사회의 학벌을 위한 사교육, 이재축적을 위한 투기, 대외 전시적 효과를 위한 허례허식을 부추기도 있다. 정부의 주요 요직 임용에 있어 다양한 관계가 쟁점이 되고 연 7조원의 사회비용이 소요된다는 경조사 관행은 대표적인 전 근대적 양식이 아닐 수가 없다.
                    
  사회정신이 물질 풍요의 가치보다 우선
 
이제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관계보다도 소통과 교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패러다임은 국민의 정서나 국가의 정신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사회철학의 기조가 변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물질의 수준이 높아진다 해도 역시 또 다른 기준에서의 갈등과 불화가 우리사회를 짓누르게 될 것이다. 지금 사회적 갈등이 더 커 보이는 것은 21세기의 선진 가치관을 갈망하면서 20세기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의 타성에 젖어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회정신의 개량은 경제지표처럼 단기간 내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부침하는 지표와 달리 온전한 사회의 문화체계는 이룩하는 데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한번 정착된 선진 시스템은 역사를 통해 영원히 국민성으로 발현되게 된다.

21세기의 메가 트렌드를 관조하는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우리사회가 고수하고 있는 구습의 타파가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제는 사회가 급속하게 이전 카리스마의 수직적 경계적 형태에서 수평적 통합적 패턴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21세기의 키워드는 정보화, 지식기반, 문화감성, 디지털, 글로벌, 네트워크가 되어 있다. 여기에 미국의 저명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사회적 평등의 핵심으로 여성을 중요한 사회가치로 들고 있기도 하다. 바로 소프트 파워가 21세기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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